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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은 테이블 너머ｌ카테고리

땅그림 l 2018-12-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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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바스러지고 스러져간다. 삶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내미는 손을 잡고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삶은 변화되고 우리는 다른 세상들로 나아갈 수 있다.

작가는 당신과 나, 혹은 지구의 먼 누군가를 통하여 드러나는 어떤 사랑의 근원, 반복되는 사랑의 이미지들을 포착하려 한다.

거기에는 어떤 구속도 없이 신발 한 켤레에 의지하거나 소용에 닿지 않을 듯한 물건들이 담긴 한 개의 배낭을 지고, 사랑하기 위해 늘 떠나는 이들이 있다. 혹은 사랑하는 이와 머리를 붙이고 잠들며 같은 꿈을 꾸는 하나가 되길, 사랑하는 이를 몸속에 집어넣은 채 그의 목소리를 영원히 듣길 원하는 이가 있다.

홀로 어두운 방에서 답신이 보장되지 않는 수신자에게 안부를 물으며 발신을 멈추지 않고 기다리는 이가 있다. 사랑이란 사랑받는 이를 통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일이며 온전히 이해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별 후 고독에 머물며 제 안에 부서지지 않은 사랑의 온기를 끌어안는 이가 있다.

때로는 알리고 싶지 않은, 혹은 알려질 수 없는 비밀이 되어, 다정한 눈빛으로 뜨겁게 공모한 순간들이, 돌이킬 수 없어 열광적으로 뛰어든 몰아의 시간들이, 그 안에서 우리를 변화하게 한 세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때로 서늘한 칼을 사랑 가운데 놓는다. 사랑의 근원을 향한 질문을 등한시한 채 습관적인 행위에 머무르며, 사랑의 탐구를 관습적인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사랑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을 바라봄에 있어 고통스러운 순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일그러져 보이는 서사를 관철하며 자신의 억압을 헤쳐 나가려 분투한다. 그것은 빛에 눈멀지 않고 어둠을 응시하려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사랑의 기억이 사랑의 실제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비록 덧없이 스러질지라도 아름답게 새겨진 장면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온 존재를 흔들던 첫 순간들로 우리를 데려간다. 작가는 그런 순간들을 또 가만히 응시한다.

헤어져야 했거나 끝내 닿을 수 없어 홀로 남게 되었다 해도, 그래서 오랜 통증을 겪어야 했어도, 어떤 사랑의 이미지들-누군가의 절실한 시, 침묵 속에 완성한 그림 한 편, 혹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낯선 어떤 장면 들 속에 깃들어 있는-을 마주하며 우리는 툭, 울음을 멈추고 제 안으로 파고들던 슬픔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이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사랑의 시간들을 관통해 오면서 사랑을 대하는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도 들려준다.

절반만 말하기. 그는 소통의 근원적인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한편, 사랑받는 자들에게 더 많이 자리를 내어준다. 스스로에게 거리를 취하고 모든 문장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다. 고통 가운데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도화지가 닳을 만큼 붓질을 거듭했던 그 자리를 ‘아름다운 그늘’로 읽어준 사람, 그렇게 호출되는 사랑의 기억들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