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노려보며 준족 아킬레우스가 말했다. "오오, 그대 파렴치한 자여, 그대 교활한 자여! 이래서야 어찌 아카이오이족 중 어느 누가 그대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여 심부름을 가거나 적군과 힘껏 싸울 수 있겠소? 내가 싸우려고 이곳에 온 것은 트로이아의 창수(槍手)들 때문이 아니오. 그들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내 소나 말들을 약탈한 적도 없거니와 전사들을 기르는 기름진 프티아 땅에서 내 곡식을 망쳐놓지도 않았소이다.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울창한 산들과 파도 소리 요란한 바다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오. 그대, 파렴치한 철면피여! 우리가 그대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은 메넬라오스와 그대를 위하여 트로이아인들을 응징함으로써 그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이런 사실은 염두에 두지도,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가 피땀 흘려 얻었고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내게 준 내 명예의 선물을 그대가 몸소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다니!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의 번화한 도시를 함락할 때마다 그대와 동등한 선물을 나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소. -31쪽
다른 장수들은 모두 부드러운 잠에 제압되어 그들의 함선들 옆에서 밤새도록 잠을 잤으나, 백성들의 목자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머릿결 고운 헤라의 남편이 번개를 내리치며 형언할 수 없이 큰비나 우박을 만들 때와 같이, 또는 들판 위에 하얗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나 고통을 가져다주는 전쟁의 큰 아가리1를 만들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자주 아가멤논은 가슴속 심장 밑바닥으로부터 깊은 한숨을 쉬었고 그의 마음은 안에서 떨고 있었다.그리고 그는 트로이아의 들판을 바라볼 때마다 일리오스 앞에서 타오르는 수많은 화톳불과 피리 소리와 목적(牧笛) 소리와 사람들의 소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함선들과 아카이오이족 백성들 쪽으로 시선을 향할 때마다 그는 저 위에 있는 제우스를 우러러 빌면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고 그의 영광스런 마음은 크게 신음했다. -263쪽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전우를 생각하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 그는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파트로클로스의 남자다움과 고상한 용기를 그리워했다. 아아, 전사들의 전쟁과 고통스런 파도를 헤치며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고,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그는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모로 누웠다가 때로는 바로 누웠다가 또 때로는 엎드리기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다의 기슭을 정처 없이 거닐었고, 새벽의 여신은 그가 모르게 바다와 해안 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면 그는 날랜 말들에게 전차 밑에서 멍에를 얹고는 끌고 다니기 위해 헥토르를 전차 뒤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헥토르를 끌고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고, 헥토르는 먼지 속에 엎드러져 길게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폴론이 헥토르를 불쌍히 여겨 죽었어도 그의 살을 온갖 손상에서 지켜주었으니, 그는 황금 아이기스로 그의 온몸을 덮어 아킬레우스가 끌고 다녀도 그를 찢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651쪽
그는 먹고 마시는 일을 이제 막 끝냈고, 그의 앞에는 아직도 식탁이 놓여 있었다. 위대한 프리아모스는 그들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 맞추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무서운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고향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방의 어떤 부잣집으로 피신하게 되면 그를 본 사람은 누구나 깜짝 놀라듯이, 꼭 그처럼 아킬레우스는 신과 같은 프리아모스를 보고 깜짝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에게 프리아모스는 이런 말로 애원했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혹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그분을 괴롭히더라도 그분을 파멸과 재앙에서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래도 그분은 그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아들이 트로이아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 하나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오. -6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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