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천히 읽어야만 했던 책, 홍세화 작가의 반가운 신작 《결: 거침에 대하여》 였다.

앎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과 인지하고 있는 것들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지식이 나의 앎이 되려먼 나의 성찰과 사유라는 강을 필연적으로 지나쳐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사상과 나의 의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앎들이 모여 나의 사상을 형성하는 것인데 과연 내 사상의 첫 단추는 어디였을까. 내 인생의 결과 대부분 맞닿아있는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컸을 테지만서도 외적으로 내가 접한 언론이나, 책, 선생님의 역할 역시 적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 라고 이야기하곤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 현재 저 책 내용이 기억조차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내 인생의 베스트 책 OO위를 물어보신다면 분명히 상위권에 위치할테다. 어떤 영향인지는 구체적으로 뜯어볼 수는 없겠지만 어렸던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건 분명하므로.(참고 : 저 책이 특정한 사상을 선동했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 사실 인터뷰집을 제외하고는 약 10년만에 홍세화님의 신작을 읽게 된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이 자라고 넓어진 만큼, 홍세화님의 텍스트도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공감하는 만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법인데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가능하였다.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비단결이 고운 것은 올이 많아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함이다. 그는 '회의하는 자아'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게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고결함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고결함으로 이끈다.

/ 나를 고결하게 지을 자유, 34-35p

회의하는 자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닫고 있음에 감사하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자아에 대한 회의와 성찰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사회에서 쓰임받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 조차 사회로부터 주입된 사고일수도, 결국은 노동 가치를 인정받기 위함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역시 중요하지만 나의 생각을 다듬어가고 발전시키며 섬세한 결을 만들어 타자를 넉넉히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난민, 젠더, 계급, 분단, 이념, 지역, 생태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혐오와 갈등 (그리고 모순적 사고)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내가 가져야할 태도.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말이다. 133p

피지배계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며 내 동료들과 나의 가족, 이웃들을 지킬 수 있는 힘 역시 오직 사유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살고 있는 '80'의 사유세계는 '20'의 것들로 채워지며 '80'에 속한 자신의 삶을 소외시킨다 (132p) 내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면 타자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모해야 한다. 늘 기억할 것.

우리는 '바위는 확실히 부서진다'는 확실성이 아니라 '바위도 부서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바라는 사회 변화는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본과 국가권력이 사회 변화의 확실성을 용인할 리 없다.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이 아닌, 덜 추악한 세상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178p

유전무죄가 유전무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도록 이끌며', '육체적 아픔'으로 이끄는 이 사회를 언급하는 구절도 있었는데, 예전에 내가 모 리뷰에서 '사회적(경제적) 계급이 권력의 시계추가 되었다' 라는 표현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였다. 작금의 대한민국. 우리는 왜 작은 일에 더 분개하며,내 주변이 아닌 '20'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행동할 것. 알량한 지적 허영심과 윤리적 우월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변화와 행동으로 삶을 살아낼 것.

『결: 거칢에 대하여』,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해준 책.

+ 사법제도의 변화를 불러 일으킨 장발장 은행 이야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법 제도의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는 박준영 변호사님이 생각났음.


사회운동의 세 가지 축으로 "조직하라, 학습하라, 설득하라(선전, 홍보하라)"를 꼽는데, 조합원이든 단체 회원이든 회의하는 자아가 아니므로 학습도 하지 않고 설득도 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조직'뿐이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불렀다." 브라질의 빈민 지역에서 활동한 뒤 생을 마감한 동 에우데르 카마라 대주교의 말이다. 225p


원문 : https://blog.naver.com/nabaksa/221949343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