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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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제서야 서서히 꽃이 피려고 하고 있는 페미니즘이 있고.

20세기, 더 삭막하고 숨쉬기 힘들었던 시대에 씨를 틔우고 싹이 자라났던 페미니즘이 있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 콘텐츠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책, 도서, 영화, 드라마 등등. 반갑기도 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페미코인'에 탑승해서 내실 없이 찍어내거나 기획된 콘텐츠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무조건 페미니즘 콘텐츠라고 해서 분별 없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 법. 이 와중에 좋은 기회를 통해 철수와영희 출판사의 《조선의 페미니스트》를 읽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철수와영희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책을 인상깊에 읽었던 지라 그 이후로 출판사명을 볼 때마다 희한하게 더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네이밍 자체가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페미니스트》 는 역사학자 이임하의 '식민지 일상에 맞선 페미니스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기엔 너무나 많은 뜻을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수많고, 서로 다른 '페미니즘'들이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생각이 있다면, 여성의 인권 상승이겠지. 여기서는 여성의 인권 상승도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인권 상승을 부르짖었다. 일반적으로 여성학자들은 한국 페미니즘의 출발점이 1099년 이화여대에서 시작된 여성학 강좌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이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현장 속에서, 사회 운동 속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현실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가 그 시절의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조선의 페미니스트》 이전, 일제감정기 대중잡지에서의 대담과 설문조사 결과를 다룬《삼천리 앙케트》에서였다.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여성이 이혼을 했을 때 남편에게 위자료를 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다는 거다. 당시 여성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했던 박인덕 여사는 남편의 아내, 자식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사람으로서 사회사업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로 인혜 각계의 의견이 분분하며 논란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해, 박인덕 여사의 이혼 소송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이혼 시 여성이 남성에게 위자료를 주었던 첫 사례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비록 백만장자의 집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조선의 여자는 그 재산에 대하여

하등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지금 조선의 가족제도요 사회제도입니다.

조선의 페미니스트, 180p

이렇게나 꽉막힌 시대에서 유영준, 정종명, 정칠성, 고명자, 허균, 박진홍, 이순금은 각자의 삶을 여권 신장을 위해 힘썼다. 건국부녀동맹, 조선부녀총동맹(부총),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시대에서 한걸음 더 앞서나가고자 한 공동체들의 리더가 되어,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고, 옥중에서 아이를 낳다가 아이를 떠나보내기도 하였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도 안타까운 점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팜므 파탈의 여성 판타지로 소모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박진홍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자' 로서 그의 삶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여성' 사회주의자의 비극적 사랑과 삶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 그려졌다. (262p) 여성 사회주의자와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기자는 끈질기게 '성욕', '정조', '순결' 등 자극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슈거리가 될만한 대답을 이끌어내려고도 했었고.

그 때 당시에 이 분들이 썼던 글을 보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사람이 사람의 정과 사랑을 구하는 데 있어서 무슨 수치가 있으며 거기에 무슨 욕심이 있는가. 노동자가 하루 10시간이란 과격한 노동을 부담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로서 그의 적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데 무슨 틀린 일이 있으랴. (허균, 245p)

지금보다 더 억눌린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단단하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셨을까, 존경스럽다. 이임하 저자께서 이 책을 집필할 때에 자료가 부족해 힘드셨다고 했는데, 그 정리되지 않은 자료들을 모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탄탄한 역사적 사료들로 구성된 책을 쓰신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흩어져 있던 수많은 '조각'들을 모아 역사속에서 주목되지 못했던 여덟 사람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든 것이다. 이임하 저자님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 여덟 명의 페미니스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못했을 테다.


책을 읽어가는데 이희호 여사님이 자꾸 떠올랐다. 이희호 여사님은 1922년에 태어나 얼마전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 언급된 여덞 명의 페미니스트가 지낸 시대를 같이 지내시고, 가는 길은 다를지언정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오셨을 이희호 여사님이셨을테다. 이희호 여사님은 자서전인 <동행> 에서 본인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차별받지 않고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그는 “너무 일찍 꾼 꿈”이라면서도 “민주주의의 발전만큼 여성들은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행복하다”라고 적었다.

그들이 먼저 꾼 꿈이 있기에 우리가 그 꿈을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거겠지. 이 책에 실리지 못한 분들이 더 많을 테다. 그 모든 분들의 몫까지 합하여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작가의 서문에 《조선의 페미니스트》(1권) 이라고 되어있었으니 앞으로도 시리즈가 계속 되길 바란다. 이런 책이 한권 한권 더 나올수록 한국의 페미니즘도 한겹 한겹 그 역사가 새로 쌓이게 됨을, 역사에 함부로 새겨지지 못한, 배제된 여성 인물들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통로가 됨을 믿는다.


박진홍, 1914~?. "십 년 감옥살이를 빼면 이제 겨우 스물 세 살이라니까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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