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징비 - 치욕의 역사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박기현 지음 / 시루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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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류성룡의 징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알려진 류성룡 사실, 류성룡의 이름은 많이 알지만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않다
몇 개월뒤에 징비록이라는 드라마가 방영한다고 한다. 명량의 성공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높아진것 같다. 임진왜란... 이 뻐아픈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이는 류성룡의 징비를 차근 차근 하나씩 짚어가면서 과거의 오욕을 답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박기현님이 발간한 '류성룡의 징비'를 통해 무엇을 배울수 있을지 짚어 보자.

저자는 류성룡선생에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첫째, 청렴하였다. 그는 재물과 여색,직위를 탐하지 않았다
둘째,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진창 속에서 뛰어들어 전장을 수습하고 민심을 달랬다.
셋째, 책임지는 공직자로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였다. 이순신,권율등을 특진시켜 전란에 대비케 했다. 징비는 1592년 5월부터 시작한다. 선조를 가까이서 보고 선조의 행적을 서술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항복을 호통치는 장면도 나온다. 비겁자 선조가 조선땅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할때, 류성룡선생은 그를 말렸다. 앞일을 내다보고
조선과 명나라,일본 삼국간의 복잡한 셈을 하면서도 긍정적인 해법을 제시하여 조정 여론을 항쟁하자는 것으로 돌려놓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만약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했다고 어떻게 되었을까? 민초와 장군들은 싸웠겠지만 왕이라는 구심점이 없으니일본과의 전쟁에서 결국에는 패하지 않았을까? 선조는 왕이 아니다 그는 그냥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인간말종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1년전에 변란의 사태가 일어날것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그놈의 당파 싸움으로 결국에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채 왜란을 맞았다. 만약 그때부터 준비를 철저히했다면 어땠을까? 역사는 달라지고 일제시대의 치욕도 없었을까?
류성룡이 예견하고 우려했던 전쟁의 서막이 1592년 3월2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책에서는 류성룡을 제갈량과 같다 했다. 그는 군사와 국정에 관한 열가지를 조목으로 분류하여 임금께 올렸다.
제1조, 척후병과 요망대의 설치
제2조, 적에대한 장점과 파악
제3조, 속오의 정지
제4조, 약속을 분명히 한다.
등등 총 10가지의 조목을 설명하고 또한 전국의 요새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인조대의 양대 호란또한 류성룡의 방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함에서 기인한것이다. 류성룡은 백성들중 건장한 사람을 모아 도성방위와 화포 훈련병으로 활용할것도 제안했다. 류성룡은 비록 문신이지만 무신보다 군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던것 같다.
특히나 류성룡은 사람들 인식속에 이순신과 꼭 같이 묶여져 있다. 선조가 전란에 나설 장수를 추천하라는 말에 그는 이순신의 이름을 대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 종6품에서 정3품으로 파격적인 특진을 한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이순신이 모함에 걸려 고문을 받고 좌천을 당할때 류성룡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이부분은 역사학자의 몫이므로 판단은 보류하고 싶다. 전란을 기록한 류성룡 다른것을 떠나 이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 할수 있다.


혹자는 징비록이 너무 명나라의 사대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대상이 명나라를 거의 신처럼 숭배하던 시기이므로 이부분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징비록을 통해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을 많은 교훈을 배울수 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금... 역사는 되풀이 될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징비록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겉으로는 웃으며 손을 내밀어도 뒤로는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대비해야 함을 가르쳐주는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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