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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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인기있었던 책을 이제야 봤다.
그 땐 그렇게 피로하지 않았으니까.

근대이전은 타국, 타민족, 타생물의 위협에 대한 배타성이 행동양식의 주가 되는 면역학적 시대였다면, 후기근대는 면역학적 시대를 벗어나 긍정과잉상태의 성과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다는게 책의 중심 주제다.

강압과 공포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한계를 맞았고,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도약을 위해 성과주의로 전략을 변경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사람들을 스스로 채찍질하고 착취하게 만들었고, 남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브레이크 없이 착취당하는 개인은 결국 소진되어 우울증이나 번아웃 같은 신경적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는 진단이다.

회사를 다니며 이 책을 읽으니 크게 공감이 됐다.
난 우리 회사가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참 잘 찾아서 뽑는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연초에 성과지표가 정해지면 누가 시키지않아도 일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성과를 내기위해 야근도 알아서 하고, 출근도 알아서 일찍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다.

회사 뿐만인가 회사가 끝나고도 끊임없이 운동, 취미활동들을 하면서 알아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여가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착각이며, 그러한 활동과잉은 멈춰서 사유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할 여지조차 박탈당한 현대인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잠시라도 뭔가를 하지않으면 불안하고, 사회적 기준의 갓생을 위해 노력한다.
그나마 현대인 평균에 비해 많이 걷는 편이긴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계속 팟캐스트를 듣거나 예능을 보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다.

멈추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싶지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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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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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알람은 내 폰에 오는 수많은 알람 중 가장 유용하다. 놀랍도록 정확하게 내 취향을 파악한 그 어플은 클릭해볼 수 밖에 없는 책 광고로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집 책장에 자리도 없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많아 장바구니에 넣어놓기만 하고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 책은 달랐다.
도발적인 제목은 알림에서부터 내 기대감을 증폭시켰고, 책 소개와 목차를 보자마자 나는 바로 결제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나는 이 책이 내 인생책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할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 책을 읽은 기쁨에 서론이 너무 길었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개념을 주창하며 과학이 객관적 결론을 낸다는 환상을 깨트렸다.
과학적 방법론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과학자들도 사람이라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 사실이 생물학에도 적용 된다는건 당연한 이야기다.
문명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된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그 패러다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그 당연한 것을 못보고 있었다.

책 표지가 아주 잘 보여주듯 이 책은 진화생물학계의 오래된 편견을 전복시키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다윈의 성선택 이론으로 부터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성에 적극적이고 군림하는 수컷, 성에 소극적이고 지배당하는 암컷이라는 그 편견말이다.

수컷 고유의 특성이 암컷과 자원을 통제하고, 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본성이라는 신화는 다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도킨스가 난자와 정자의 크기 차이가 이미 기다리는 암컷과 능동적인 수컷의 정체성을 정하였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저자는 과학자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러한 법칙을 반증하는 현상들을 무시해왔고, 애초에 수컷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여성 연구자들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전통적 성관념을 전복시키는 다양한 생물의 암컷들을 연구했고, 그 결과들은 또다시 과학계에서 박해당하다 증거의 누적으로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수컷과 구별되지않는 생식기를 가지는가하면, 수컷을 선택하고,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고, 수컷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무리를 이끌고, 경쟁자를 잔혹히 처단하는 암컷들.
더 나아가 동성배우자와 평생을 보내고, 수컷 없이 번식을하는 사례들, 거기에 수시로 성별이 바뀌는 어류들까지.

자연은 인간의 편견에 손 들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과학계는 지배하는 수컷 패러다임의 예외사항이 동물계에서 발견되면 마치 인간남성의 존엄성이 공격 당하는것 마냥 거부반응을 일으켜왔다는 것이 코미디다.

자연은, 진화는 편견없이 진행된다.
암컷,수컷을 구분하지않고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찾아 나아간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종종 연구결과가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그건 순수하게 자기가 믿고있는 대로 자연이 움직일 것이라는 큰 오만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내용 자체로도 아주 재밌는 책이지만 동시에 패러다임을 돌파하기위해 싸워온 멋진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까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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