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아무리 밋밋한 영혼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다시금 정의감에 활활 불타오르거나, 명백히 부도덕한 사건들에 분개하거나, 자기 나름의 진실했던 사랑에 대한 회고에 젖어들지도 모른다. <적과 흑>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 사랑과 배신, 위선과 인위적인 기교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들은 물론,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성을 고려한 사실주의적 소설이다.

 

 

 

작가는 170개의 필명을 사용한 마리 앙리 벨이다. <적과 흑>에 사용된 그의 필명은 스탕달이다(어느 작은 마을 이름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열정적으로 책을 쓴 것 같다. 누구든 이 책에서 그의 숨결과 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그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고요히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배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귀족들이 다시 예전의 특권을 되찾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권력을 되찾게 된 자들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시대다.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인 쥘리앵처럼 명석하고 박학다식한 하류층의 젊은이들을 증오했다. 바로 이 시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쥘리앵은 그들을 넘어서는 출세를 꿈꾼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쥘리앵은 출세를 위해 위선적인 사람이 되어보기도 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교활하게 얻게 된 것에 대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그가 계획적으로 얻어낸 사랑과, 진심으로 얻어낸 사랑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또한 쥘리앵이 출세를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신학생들 대다수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일, 그리고 금전욕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매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상류사회의 숨 막히는 권태와 위선을 경멸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여 호화롭게 꾸민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라 몰 저택에 머물며 여러 인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쥘리앵을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며 스스로 '낙오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귀부인' 마틸드가 그에게 고백해오자 그것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기주의의 사막에서는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다!' 라며 이상과 현실, 출세를 위한 욕망과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오는 괴리감을 표출한다. 그는 이렇듯 꿈꾸는 '이상'의 실태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저항하는 것'에 기대고자 하기도 한다. 비록 쥘리앵은 출세를 바라긴 했지만 그가 진정 바라던 것은 오히려 사회적 출세와 공존하기 힘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는 꿈꾸던 '이상'에 행복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수록 자신이 바라던 행복과는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쥘리앵의 고뇌와 심적 갈등이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지 되묻는다. 행복에는 공식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영혼이 갈망하는 길에 오름으로써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적과 흑>은 결코 절망적인 비극이 아닌, 독자에게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쥘리앵이 출세를 꿈꾸는 것은, 현대인의 모습과 별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타인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고자 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짓밟기도 한다. 정의나 양심보다 개인의 이득이 우선시되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사회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권력을 가진 인간은 대개 쥘리앵과 같은 하류층 사회 계층들을 그들의 통제 아래 묶어두고자 한다. 그것이 19세기 프랑스이건, 현재의 한국이건, 세계 곳곳에서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하는 것 외의 다른 것들은 '알지 못 하도록' 억압받고 있다. 상류층 사람들은 손쉽게 살 수 있는 몇십만 원짜리 명품 음악회 티켓이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문화생활의 일부이지만, 하류층 서민들에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사치인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누군가는 따뜻한 최고급 핸드드립 커피를 음미하고, 누군가는 당장 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차가운 바닥을 마다하지 않고 길거리를 전전긍긍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역시 공정무역이 아닌, 부당한 거래로 인해 노동력을 착취당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간다. 사회계층의 엄청난 간극에 대한 회의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탕달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적과 흑>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그가 <적과 흑>에서 파헤쳐진 인간의 욕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한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파생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결코 꺼트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다만 잊고 있을 뿐이다. <적과 흑>은 오늘의 우리에게 삶에 대한 간절한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탕달은 우리가 진실을 갈구하기를, 우리 자신의 욕망을 바로 알기를 노래하고 있다.

 

 

스탕달은 진지하고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을 매우 재치 있고 명쾌하게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독자의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 내는 데 탁월한 것 같다. 독자는 쥘리앵에 완전히 투영되어 쥘리앵으로서 꿈을 꾸고, 분개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에 빠지며,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적과 흑>은 절대 진부한 고전이 아니다. 읽히고 또 곱씹어야 할 우리의 시대상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쥘리앵은 처형을 당하기 전 사회계층의 심각한 불평등을 규탄하며 자신의, 그리고 하류층의 소신을 지킨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비극일 수 있는 이 고전은, 무엇이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지, 무엇이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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