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마니아에서 약사이자 약품 판매사원으로 일하던 평범한 이웃 카페시우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신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유용성이 없을 시 손가락 하나로 가스실로 보냈다.

.

"일하고 싶소?"
- 더이상 못합니다. 너무 늙었어요.
그러자 카페시우스가 왼쪽을 가리켰다.
"일하고 싶소?"
- 그렇습니다.
카페시우스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

<사람을 좋아하고 친절하며 다정다감함 그 자체>였던 카페시우스는 훗날 아우슈비츠에 훌륭히 적응하여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 선별하는 작업에 당당하게 자리했다. 그는 <악마> 그 자체였다.

나치와 대기업의 협작으로 만들어진 치클론 B를 비롯한 각종 화학약품들은 대량살상무기이자 각종생체실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기업은 이윤을 좇았고 권력은 자신들의 보존과 번영을 좇았다. 그들에게 수많은 유대인과 희생자들은 실험용 쥐만도 못한 존재였다. 하루에도 수십대씩 수감자를 꾸역꾸역 실은 열차가 아우슈비츠로 들어왔다. 쌓인 시체를 대신할 수 있는 인력이 매일 충원되었다.

한편, 나치 장교들은 자주 가족들을 아우슈비츠로 초대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일광욕을 하는 등 단란한 시간을 즐겼다. 몇 Km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수감자들로부터 탈취한 의약품, 귀금속, 그 외에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모두 착취의 대상이었다. '사람 좋은 약사 아저씨' 카페시우스는 금품갈취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가스실에 쌓인 시체에서 금니를 채취해 골드바를 만들었다. 전쟁 중에는 금만큼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철저한 준비성은 훗날 그가 나치의 전과를 지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전세가 기울면서 나치 지도부는 아우슈비츠의 흔적을 지우기에 급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수많은 기록물을 파쇄하고 시체구덩이를 폭파하고 남은 유대인들을 가능한 빨리, 그리고 많이 죽였다.

연합군의 승리로 상황이 역전되자 지난날의 용사들은 과거를 지우거나 각색하거나 신분을 세탁하거나 제3의 장소로 도피하는 등 제각기 살 길을 찾았다. 카페시우스도 "탈나치화" 과정을 철저히 밟아 '자신은 선량한 시민이며, 전쟁 당시 상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수감자들의 안전과 위생에 최선을 다했다, 결코 선별작업이나 생체실험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법원과 스스로에게 세뇌했다.

.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일찌감치 도망을 갔겠죠." 체포 직후 보거는 이렇게 말했다. 보거의 아내는 한 독일인 기자에게 그녀도 남편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그런 짓을 저희 남편이 저질렀을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죽일 수 있었겠어요? 우리에게도 자식이 있는걸요."

.

이책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장교, 아이히만은 우리처럼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과 카페시우스의 말대로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상관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사를 결정할 권한같은 건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이든 윤리든 인간성이든 양심이든,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이익을 취했다.
전범자들이 끝까지 오리발 내밀며 무죄판정을 받기 위해 수작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격분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어제와 오늘이 이어져있기에
어제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어제의 과오를 내일 또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기에 수많은 카페시우스들은 마땅히 죄값을 치러야 한다. 카페시우스는 과연 미꾸라지처럼 처형 위기에서 빠져나왔을까? 아니면 죄악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았을까? 그의 최후를 꼭 직접 확인하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