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d Mehldau - Highway Rider [2CD]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 (Brad Mehldau Trio) 외 연주 / 워너뮤직(WEA)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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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자의 멀다우.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었던 그의 자신감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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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기본원칙
빌 코바치, 톰 로젠스틸 지음, 이재경 옮김 / 한국언론재단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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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원칙. 딱딱한 번역이 흐름을 막지만, 언론을 만들고, 읽는 모두를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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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선 2013-01-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다가 화납니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번역으로 망가뜨리다니.
 
저널리즘의 이해
김춘식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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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마다 저자가 달라 다양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가격 책정이 너무 잘못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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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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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얼마만에 쓰는 책에 관한 내용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갑자기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도 의문스럽기도 하고. 예전엔 책을 잡는 순간에 어떤 어떤 글을 써야지 라는 게 생각이 날 정도로 독서 후기 쓰는 것에 대한 압박 아닌 압박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젠 그게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니 지식습득 면이나 정리 면에서는 그러한 시기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다시 봐야 할 페이지만 노트에 조금씩 적어두고 나중에 읽고 나서 그 내용을 다시 타자로 쳐넣고. 그렇게 반복 하는 것이 기억에 훨씬 오래 남는 법이다. 하지만, 요즘은 무언가 책 읽는 행위 자체만 중시 하다 보니 그런 한 행동들이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꼭 쓰고 싶었다. 큰 이유를 댈 순 없고, 단지 이 책이 지금 내 상황이나 생각, 행동들에 하나하나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왜 좋은지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 단지 주인공들이 나와 비슷해서 일까, 아니면 중간 중간 나오는 환상적인 부분때문일까. 단지 이야기 라는 틀만 지닌 소설이 아닌 다른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같이 일하는 파트너가 요즘 한국에서 뜨는 작가 들이 뽑은 과대평가 작가 1위가 하루키 라던가? 그랬다던데. 뭐, 그런거야 상관없다. 이문열이 한 때 한국문학을 이끌어 가는 선두주자 였고, 김진명이 책만 썼다 하면 무조건 베스트 셀러 1위 였는데, 과연 지금도 그런가 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러한 평가와 순위들은 전혀 의미가 없다. 단지 나에게 맞느냐 안맞느냐, 나에게 영향을 주느냐 안주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책이라는 것이, 특히 소설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는 크다. 하지만 종류는 많지 않다. 그냥 단지 책을 읽고 나를 정리 하고 돌아보게 한다면 그것을 만족하는 것이지, 그 내용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식습득과 큰 깨우침을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찾을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혹은 이 글도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남에겐 의미 없는 문장의 나열일 뿐일 수도 있고.

  주인공은 나와 많이 비슷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먼저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난(a) 가끔 나 자신(b)을 본다. 무슨 말이냐면 살아 가고 있는 나는 a 이지만 가끔 난 b가 되어 현실의 a를 본다는 얘기다. 그게 유령처럼 혼이 나올정도는 아니지만, 단지 정신적인 행위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가끔 일어난다. 그냥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책 속에 주인공은 a이고 책을 보는 나는 b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에게 '외동'이란 개념은 사라진지 좀 되었다. 주위의 선입견과 편견이 너무 싫었고, 그러한 선입견에 맞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고 자신한다. 그러한 것들을 부수려고 어렸을 때 부터 노력했었고, 그러함을 벗어났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최근의 나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혹은 본능속에 감추어졌던 외동이란 개념과 성격이 스믈스믈 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내 속에 그러한 존재론적 혹은 태생적인 모습들이. 그것들이 발버둥치다가 이제서야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이 책을 보는데 이 책의 주인공도 외동이다. 또한 생각 하는 것들도 비슷했고, 내가 내 속의 악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악이 그동안 억눌려 있었고 잠시 터져 나와버렸을 때, 그 때 이 책을 읽는 순간에 그 내용에도 주인공이 내면의 악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혼란스러워 졌을때 책 속의 주인공도 혼란스러워져 있었고,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을 그 주인공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이게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책을 읽고 나서 이러이러한 부분이 비슷한것 같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 기억을 바꿔버렸을 수도 있다. 책을 읽고 나서의 내가 책속의 주인공과 일치화를 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오류냐면, 원래는 안그런데 괜히 책 보고 나서 그것을 연결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달랐다. 읽는 순간에 비슷함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그래서 난 하루키를 벗어 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섹스에 대한 생각도 하루키를 닮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맨마지막 해설 부분에 질문과 대답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독자 : 저는 18세의 여대생인데, 하루키 님의 작품을 읽고 언제나 느끼는 건 성직인 묘사(섹스나 마스터베이션)을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자연스러운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일반적인 섹스관은 부정적이며 부끄러운 일처럼 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섹스 장면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충동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것은 성행위를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하루키 : 나는 개인적으로 섹스란 인간과 인간이 깊이 서로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생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강간과 같은 부정적인 예는 제외하고, 섹스라는 문제를 작가가 다루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빼놓고는 크고 중요한 이야기를 작품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데뷔 시절 작품들, 즉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은 거의 성 묘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쓰는 소설의 이야기가 크고 깊어감에 따라, 나는 아무래도 성이나 폭력에 대해서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성을 정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은 육체와 정신을 결부시키는 통로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섹스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에, 섹스를 묘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내 작품 속에 나타난 성 묘사를 불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무척 반갑게 생각합니다.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p 366-367


  땡큐, 하루키 라고 말하고 싶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사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잘 말해주고 있으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사랑일 수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다. 요즘 들어서 더욱 실감하고 있지만, 과거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후식의 맛이 달라진다. 무슨 말이냐면, 어떠한 과거든 중요하지 않은 과거는 없지만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서 내 곁에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피해가 된다, 누군가에게든. 그러한 과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면서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른 인생의 방향을 이 책은 보여준다. 어렸을 적 주인공은 교제하던 여성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준다. 그것은 그 여자에게서 표정을 빼앗아 버린다. 깔끔하지 못함이 남긴 흔적치곤 꽤나 잔인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래도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과거를 지배하고 있던 여성을 더욱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게, 나 자신과 닮았다. 피해를 주고 싶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내 삶이고 내 사랑이고 내 흔적이다. 그러함이 태생적인, 처음에 말했던 '외동' 개념과 결부 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프로이트를 점점 알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고.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고, 너무 많은 내용을 첨부한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읽는 내내 너무나도 그 시간이 소중했고 나에겐 의미 있었다. 그냥 누군가가 '난 너가 무슨 생각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라고 얘기 하고, 나 스스로도 그 사람에게 그 얘기를 해줘야 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주고 싶다.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서점에서 구입하여 주고 싶다. 그리곤 왠지 '환영해, 그리고 고마워'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도, 이기적인 외동의 태생적 영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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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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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부터 직접적으로 말하면, 요런 책들이 날 더욱 더 책을 보게 만들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싶다. 사실 책을 제대로 한권도 읽지 못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이게 뭐야, 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책 중간 중간에 빨간 색으로 표시도 되어있고, 갑자기 글들이 한 페이지에 한 줄만 나오고, 중간 중간에 알 수 없는 문 손잡이 사진 들도 나오고, 텍스트들이 오류난 것처럼 마구마구 뭉쳐져 버린다거나. 여튼, 이 책은 소설 이라는 형식을 약간 바꾸지 않았나 싶다, 그게 또한 좀 잘 들어 맞았던 것이고.  


  예술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한마디로, 그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예술이란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너는 왜 사냐 라는 질문에 답하는 거랑 마찬가지다. 교양 시험 때 예술이란 어떠 어떠한 것이고, '사이버 펑크'도 어떠 어떠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이버 펑크'도 예술로 인정 할 수 있다, 라고 썼는데 A+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예술이란 것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예술이란 삶을 바꿀 수 있고,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술이란 어느 수준 이상의 것이어야만 인정 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위치의 가능성은 삶을 이끌 수 있는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나 싶다, 순전히 내 생각으로만. 그리고 예술중에서도 한 가치를 창조해 내어 인정받기 위해선, 새로움에 대한 무서움이 없어야 한다고, 그 도전정신이 튼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새로움을 바탕으로 기존과의 융합을 통한 좀 더 발전적인 것을 내어 놓는다면, 그게 한 단계 발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 까 싶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봐도, 이 소설은 꽤나 신선한 시도였고, 그게 잘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중간 중간에 텍스트와 연관된 사진들을 나열하고, 그 사진을 꼼꼼히 살핌으로써 더욱 소설을 직접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사실은, 내가 반했던 부분은 이런 부분보단, 그의 창조적 언어 선택 능력이다. 아, 이 사람은 어쩌면 천재 일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 하나하나가 섬세하면서도 진득하다. 그게 좀 도가 심해져서, 사실 이게 9살이 말할 정도의 수준의 이야기는 안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만약에 주인공 오스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얘가 진짜 천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한 내가 좋아 하는 일상의 못 보던 모습들 혹은 연관 없어 보이던 것들을 끌어들여 연결시키는 그의 방식은 날 황홀하게 만들었다. 왜 이별하는 데 지금까지 다 낡아 빠져서 버리게 된 '구두'들이 생각이 났을까. 그 낡아 버린 구두의 아련함과 옛 기억들이 상기시키는 회상이 이별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이미 가슴으로는 다 이해하고, 그게 더욱 슬펐던 게 이 책의 장점이었다.

 

  나 :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나는 머리에서 해골을 벗는다. 종이 반죽으로 만든 것이지만 아주 단단하다. 그것을 지미 스나이더의 머리에 내리치고 또 내리친다. 그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그렇게 힘이 세다니 믿을 수가 없다. 온 힘을 다해 그의 머리를 다시 내리친다. 피가 그의 코와 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피를 흘렸으면 좋겠다. 그래도 싼 놈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엄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관객도 이해가 안 된다. 셰익스피어도 무슨 소린지 도통 못 알아먹겠다. 체육관 천장 바깥에 있을 별들도 하나도 말이 안 된다. 그 순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지미 스나이더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의 피. 그의 이빨이 부러지도록 때린다. 부러진 이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온통 피바다다. 해골로 그의 골통을 계속 후려친다. 그것은 론 아저씨의 골통이며(엄마를 계속 버티게 살게 해줬으니까), 엄마의 골통이고(계속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빠의 골통이고(죽었으니까), 할머니의 골통이고(할머니 때문에 망신살이 뻗쳤으니까), 페인 선생님의 골통이고(아빠가 죽어서 좋은 점이 있느냐고 물었으니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골통이었다. 관객들은 모두 환호하며 갈채를 보낸다. 내 행동이 온당하니까. 그들은 내가 그를 패고 또 팰 때 기립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 201p 中

 

  한 어린 소년, 오스카의 상상이다, 연극중에. 마음이 아팠다. 아빠의 죽음이 한 소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란, 그리고 자기처럼 슬퍼하는 것 같지 않는 엄마와 세상에 대한 분노, 그것을 저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아이. 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나, 이 소설이 9.11 테러를 비난 하는 말투를 쓰진 않는다. 작가는 정치적인 말하기를 배제하고 한 개인, 한 가족의 얘기를 담담히 말할 뿐이다. 난 그러한 부분이 좋았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고(슬프겠지만), 중요한 건 그 속의 하나하나의 개인들이라는 것. 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그것도 접사렌즈를 가지고서 말이지. 작가는 한 소년의 상실에 대한 반응과 행동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집안에 뻗쳐 있는 전쟁과 상실에 관한 관계를 담백하게 말한다, 자극적인 말을 절대 쓰지 않으면서.

  그리고 작가는 언어의 연관성을 끊어 버리고, 예를 들어 A->B->C로 가야 될 것을 A->C로 그냥 가버리고 한참 뒤에 B를 언급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챕터들 하나 전체가 편지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연스러운 말투와 사고의 난잡함을 표현해 주기도 하지만, 처음엔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얘기가 왔다갔다 하는 건지, 내가 전후 관계 연결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자책하면서. 그래서 나 자신이 나름대로 소설은 좀 읽었다 생각해서, 소설을 잘 접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읽기는 힘들지 않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글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도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그래서 천재인줄 알았다니까.

  이 책을 읽고 쓴 글들을 읽어 보면 꽤나 칭찬을 많이 하면서도 분석적인 방식을 도입했는데, 난 그렇게 쓰질 못하겠다. 그냥 난 내가 좋았던 부분을 내 삶과 연결시켜서 말할수 있는 능력밖에 없나 보다. 그냥, 좋은 게 좋은거지, 라는 생각을 난 소설을 읽을 때 적용시켜 버렸으니까. 더 이상 소설에서 큰 의미를 찾자면 복잡해져 버리니까. 여튼, 너무 좋다니까요, 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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