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몇일 전 지하철에서 파는 <한겨레 21>의 표지를 보니 가네시로 가즈키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표지가 한겨레의 표지로 나와 있는 걸 보았다. 그것은 한국에 부는 일본문학열풍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젠 너무 진부한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내가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알게 되고 읽었던 것도 몇년이나 지났으니까. 어찌되었던, 나도 일본문학의 팬임을 피해갈 길이 없다. 모든 일본문학 작품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가벼워보이긴 하다. 재미나 위트를 느끼기엔 다른 번역작품들에 비해 일본문학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할 꺼리를 주긴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깊이있진 않다. 그래서 예전엔 무조건 책을 사서 보는 위주였는데, 요즘은 일본문학 책을 사게 될 경우는 조금 주저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한번 읽고 더 이상 들춰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난 무서운 것을 잘 못보는 편이지만, 많이 도전하려고 하고 억지로라도 좀 보려고 한다. 그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예전엔 추리소설은 손도 못댔다. 그러다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일본문학을 만났다. 예전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출판문화에선 우리가 일본을 지금 따라잡을 순 없다. 우리나라야 문고반이나 포켓북이 잘 나오진 않지만, 일본이나 다른 나라는 거의 대부분이 그 버전으로도 나온다. 한국사람들이 책을 기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책 값이나 무게 때문이라는 의견이 전혀 무의미 하다고 보이진 않는다. 어찌되었던, 그러한 바탕 때문인지 추리소설은 일본에서 꽤나 자리를 잡은 상태고 역사 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계보도 존재하고 있다(이러한 흥미로운 점 때문에 교양과목중 논문관련 교양을 들었는데, 주제를 추리문학으로 잡았었다). 이러한 정보를 찾고 찾다가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서 난 <사신 치바>라는 작품으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이것 역시 추천을 받아서 읽게 되었다. 사실, 책을 구입하고 나서야 <사신 치바>와 같은 작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구조는 <사신 치바>와 비슷하다. 이번엔 각각 다른 주인공이지만, 그 단편들 속에서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주민으로도 등장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전체적인 큰 틀을 이룬다. 이 책 소개글엔언제나 그런 말이 있다. 종말이 다가오지만, 그것에 대비해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고.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라고. 작가도 글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누누히 말한다. 분명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폭동은 있었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엔 잠잠해졌다고. 그 때부터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각각 개인 사정이 있고, 종말에 의해 가족도 잃지만 그들은 종말이라는 이름앞에 또 다른 가족을 이루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며 서로 용서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종말도 그렇다. 종말은 종말일 뿐, 삶은 살아간다. 아무리 잠을 잔다고 혹은 죽는다고 종말을 피할 순 없으니.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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