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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ㅣ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새해 들어 강신주의 제자백가 시리즈를 읽었습니다.
저자는 '제자백가의 귀환'이라는 시리즈를 내면서 첫 책으로
<철학의 시대>,두 번째 책으로<관중과 공자>를 동시에 출판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손자와 오자, 묵자와 양주, 상앙과 맹자를 거쳐 노자와 장자,
혜시와 공손룡, 순자, 한비자에 이르러 제국의 탄생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철학자가 글을 잘 쓴다는 건 강력한 무기를 지닌 것과도 같습니다.
꽤 무거운 주제를 알기 쉽게, 흥미롭게 풀어주어 정리를 잘 해줌과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나열과 짜맞추기가 아닌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요.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 의문에 대해 파고들어 당시의 정치 상황과 철학적 사유의
인과 관계를 꿰뚫는 시선은 마치 칼잡이의 현란한 칼놀림을 연상케 합니다.
무려 2500년 전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 정치논리의 단면을 날카롭게 잘라 내보이지요.
춘추전국시대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였고 전쟁이 일상화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혼란 가운데 제자백가가 출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그 디테일이 비슷한 존재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어요.
지금과는 외양이 판이한 시대적 환경이었지만 인간의 본성에 이기심과 탐욕이 자리하기에
인간의 삶의 양식과 정치 행태는 결국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정치란 결국 기득권 층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고
그런 맥락에서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를 숙고하는 고찰하는 일은
지금 여기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응시와 통찰로 이어져 반복되는 실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제자백가의 귀환' 첫 책인 <철학의 시대>는 프롤로그의 성격을 띤 책이예요.
중국 고대사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제자백가가 출현하는 시대적 배경을 알게 하죠.
갑골문자(甲骨文字)로 알려진 잔혹한 신정국가(theocracy) 상나라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적 가치를 중시했던 주나라를 살펴보고 주역, 춘추, 시경같은 당시의 텍스트를 살펴봅니다.
주나라의 예(禮)는 후일 공자의 정치철학의 모델이 되지요.
<관중과 공자>편에서는 제자백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국가주의(statism), 아나키즘(anarchism), 실재론(realism), 유명론(nominalism)에서
논리학(logic), 수사학(retoric)까지 온갖 사유들을 종횡무진 넘나들었던 제자백가의
이러한 사유들은 사변적 관심을 넘어 그들이 처한 삶의 상황에서 입은 근본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온 고육지책 이었습니다.
안정된 통치체제를 갖춰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시대사상이었죠.
우리에게 관포지교로만 알려진 관중에게 저자는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비춥니다.
시대의 탁월한 정치가 관중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제나라 환공을 첫 번째 패자(覇者)로 만든 인물이죠.
변절자 관중을 포용한 제나라의 환공은 전국시대 오패(五覇)중 최초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철저히 현실적이었던 관중은 정치적 입장을 바꾸면서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정치가가 되었고
그에 비해 주나라의 예(禮)를 회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공자는 사후에야 빛을 보게 됩니다.
중국 대륙에서 강력한 단일 제국 체제의 형성 이후 지배층의 통치논리로
공자의 정치철학이 채택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사상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지요.
강신주는 공자의 사상이 어느 정도 왜곡되어 평가 되어있음을 번번이 지적합니다.
당시 철저히 지배층의 통치논리였던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심하지요.
당시 민(民) 이라는 글자는 노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쪽 눈을 찔러 상해를 입힌
노예를 묘사한 글자이며 이는 인(人)과는 철저히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인(人)은 지배층을 민(民)은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人)을 다스리는 논리는 예(禮)이었으며 민(民)을 다스리는 논리는 형(刑)이었지요.
그러므로 공자의 인(仁)은 그 자체로 배타적인 개념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공자에게 인(仁)은 오직 애인(愛人)이고 민(民)은 사민(使民)일 뿐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던 보편적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상이라는 거죠.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을 옹호한 바탕에서 출발한 논리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후 유학은 세습 귀족이나 기득권 계층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 충실하게 작용하지요.
공자의 사상은 그의 생전에 군주의 책사가 되어 현실 정치를 도모하는 것에 실패한 이후
현실에서 초연한 철학 학파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기존 정치가들은 공자를 알뜰히 이용했고
공자는 자신의 생애동안 극도로 초연히 살며 예(禮)의 기원과 정당성을 묻기보다는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을지만 고민한 순진한 사상가였다는 게 저자가 공자를 보는 시각입니다.
고대 상나라나 주나라의 역사는 조금 낯선 시대의 이야기로 들리지만
공자의 등장은 우리에겐 매우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그건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충실하게 공자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은 국가이기 때문이죠.
중국 대륙을 지배해온 거대 담론인 유학은 중국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시대 사상가들의 골수까지 스며들었기에 제자백가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베이스에 있습니다. 조선의 유학사랑은 중국에 못지 않았으니까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며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동안 길고 긴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런 참혹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온갖 사유를 펼쳤던 제자백가 중 관중과 공자까지를 다룬
이 두권의 책은 생각보다 드라마틱 했습니다.
그 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더듬어본 저자의 치밀함과 동양 철학에 대한 내공은
연이어 등장할 손자와 오자, 묵자와 양주를 기다리게 하네요.
지난 연말 6시간에 걸친 제자백가의 귀환에 대한 저자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2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은 공간을 종횡무진 탐색하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내보이는 저자의 강의는 흥미진진함을 넘어 잔잔한 감동마저 있었지요.
저자는 국가주의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돋보인 장자나 양주를 특히 편애한 걸 보면 말이죠.
한동안 철학과 시를 버무린 책이 반복되어 출판되는 듯한 느낌에 강신주의 책을 집어들며
잠시 머뭇거렸던 적이 있습니다만 이 제자백가 시리즈는 목을 빼고 기다리는 책이 될 것 같네요.
네, 제게는 웬만한 무협지보다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