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7
윌리엄 호프 호지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잠이 오지 않을 때 해가 진 밤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상상을 한다.

희미한 달빛아래 적란운 마저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낮에는 정말 그러고싶지 않은 상황을, 밤에 잠들기 전에는 바라게 된다.

그 외로움과 차가움, 암울함이 하루동안 달궈진 마음의 열을 가라앉힌다.


나는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를 찬물에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해 우아한 빛깔과 달콤한 향을 얻었는데,

결국 컵에는 담기지 못한,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빛깔과 향기는 결국 무슨 맛이었을까. 계속 그런걸 생각하는 것은 괴롭다.

그래서 열린 결말을 작가의 마무리 능력 부족이라고 여긴다.


이 책도 아마 거미줄처럼 얽힌 전개로 독자를 손바닥 위에서 주무르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긴가민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망망대해에 홀로 놓여지는 것을 용인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아득함을 원하는 분들에게, '이계의 집'을 소개하고 싶다.





'아일랜드의 서쪽 오지에 크라이튼이라는 작은 마을. 땅 전체가 황폐한데다 주민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유명한 암석 지대인 이곳에서는 여기저기서 지면을 뚫고 나온 바위들이

파도 같은 능선과 협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협곡 너머에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기괴한 

'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나락. 나락 속에서 발견되는 기괴한 신의 모습을 한 조상들,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똑같은 모양을 한 '집'의 존재, 끊임없이 자신의 '집'으로 침입하려는 

돼지 인간들과의 두뇌싸움, 한순간에 지나버리는 영원 같은 시간들, 태양계의 종말, 다시 생겨난

우주의 녹색 구체, '잠의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고뇌에 찬 인간의 얼굴을 

하고 흘러가는 구체들......이 수기에 씌어진 세계는 과연 어디이며, 어디로 간 것일까.'  


                                                                                                _출판사 책소개



책은 군 복무 중에 읽었는데, 군생활 중 나의 작은 즐거움은 꿈일기를 적는 것이었다.

'사람이 날아다니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라는 책에서 비타민 B를 먹으면

꿈을 기억하기 쉽다는 글귀를 보고 따라해보았다. 비타민 B를 먹고 잠든 첫날,

나는 자면서 꾼 3개의 꿈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심리적인 의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추측에 비타민 B는 신체의 물질 대사를 원활하게 해주는데,

그 에너지 넘치는 상태가 깨어있을 때의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선명해진 꿈에 이름을 지어두면 4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꿈이

이미지와 함께 떠오른다. 이 책의 장르인 '우주적 공포(Cosmic Horror)'는

수면상태가 아님에도 마치 꿈에서나 볼듯한 그런 경험을 느끼게 해준다.

아래는 책에서 그런 느낌이 드러나는 부분을 적었으나, 책 자체가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담고 있다.



'나는 우리 태양계와 외부 태양계를 가르는 심연 사이로 돌입했다.

암흑의 허공을 질주하면서 나는 점점 더 커지며 밟게 빛나는

우리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등 뒤를 흘끗 보자 광활한 밤의 어둠을

배경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별들이 보였다.'   _138쪽


'연년年年이 눈 깜짝할 새에 과거로 흘러가며, 낮과 밤의 길이가 몇 분으로

늘었다. 태양은 더 이상 불타오르는 꼬리를 끌지 않았고, 이제는 적동색 빛을 

엄청나게 큰 광구가 되어 뜨고, 졌다.'   _166쪽



그런데 이 우주적 공포라는 장르가, 컴컴한 심연에 가라앉는 느낌을 바라던

내 희망을 완전히 채워주었다. 앞서 책을 추천하기 전에 망설였던 점은, 

나에게는 사막에 오아시스 같이 취향 저격한 작품이, 웅장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입맛과는 또다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라는 심연에 대해 가지는 원초적인 공포, 무지에서 오는 무기력감,

그리고 그 공포를 눈으로 만끽할 수 있다는 기쁨. 이 책의 지은이인

윌리엄 호프 호지슨(William Hope Hodgson)은 그런 '우주적 공포'라는 장르의

초석을 쌓은 작가이다. 웹에서 '우주적 공포'를 검색하면 오징어 같이 생기신

괴물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우주적 공포는


'살아서, 시각을 간직한 채로 해왕성에 끌려 들어가면 어떤 풍경을 볼 수 있을까?'

'달의 뒷면에서 혼자 서성일 때 느끼는 고독함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심리적인 암울함이다. 개인적으로 웅장하게 거대한 괴물 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깊이에서 오는 두려움으로써 자극받는 게 좋았다.





우주적 공포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영화는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인데,

영화에서 보여주는 잔인한 면이나 영웅적인 주인공의 희생보다는,

'지옥'이라는 차원에 도약해버린 뒤, 그 공포를 가득 뭍혀서 돌아온 우주선 내부의 모습과

도대체 우주적인 지옥은 어떤 모습일까, 계속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텍스트 그 자체가 불러 일으키는 머릿속의 이미지가 결정체이기에

우주적 공포가 소설과 잘 어울리는 장르라는 느낌도 받았다.


아득한 우주 속에 티끌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시간이 주는 절망감 속에서 겪게되는 공포가, '이계의 집' 안에서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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