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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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의 복수극


"복수를 결심한 날, 왜 내 심장을 뽑아버리지 못했던가!"





펭귄 클래식 판 표지. 샤토 앙페 디프 (이프 성)




어릴 적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제목만 기억하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뽑아들게 된 것은 모 게임 덕분이다. 복수귀를 자처하는 그 게임 캐릭터는 시니컬한 냉정함으로 주인공에게 우정을 표하고, 비관적인 언행 속에 인간찬가를 노래하는 기묘한 캐릭터였다. 이 입체적인 캐릭터의 원형이 된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졌고, 그것이 근 15년 만에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집어들게 된 계기였다.


어릴 적 친척 집의 서가에 앉아 몰래 읽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암굴왕이라는 일본식 제목의 축약본이었다. 표지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비참한 행색의 남자가 감옥 안에 갇힌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얼핏 들춰 본 초반부의 내용은 오싹해질 만큼 음울했다. 겁이 많았던 나는 지레 공포소설인가보다 겁이 나서 책장을 덮었고, 그 후로 너무 비참한 나머지 나까지 우울해질 것만 같은 암굴왕이야기는 잊고 살았다.


아니나 다를까, 15년 만에 다시 펼쳐 든 암굴왕의 이야기는 내 공감성 수치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억울한 사연이었다. 지극한 효자이자 충실한 연인이고, 정의롭고 선량하며 열아홉 소년. 젊은 나이에 상선 선장으로 추대될 만큼 능력과 인품도 뛰어나고 매력적인 외모와 성품까지 겸비했다. 이보다 더 주인공스러울 수 없는 인물이 그를 질투한 주변인의 모함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정치범으로 몰려 영장도 없이 구금되고, 결백이 밝혀질 것을 기대하고 정직하고 진솔하게 진술하지만, 믿었던 선의는 배신당하고 이후 14년 동안 외딴 성채 감옥에 갇혀 토굴살이를 하게 된다.


나는 확실히 이런 류의 이야기에 약하다. 선량하고 죄 없는 사람이 부당하게 고통 받고 시련을 당하는 이야기에 약하다. 몸이 거부라도 하는 듯이 심장이 뛰고 안절부절 못하며 맥박이 빨라진다. 전형적인 공감성 수치 증세다. 소설의 법칙에 따라 후에 시원한 복수극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혹시 그 복수가 허무하게 끝나진 않을지, 복수를 이룬 주인공이 죄책감이나 허무함에 못 견뎌 더 큰 파국으로 빠지진 않을지 걱정이 돼서 참을 수 없다.


이렇게 자잘한 걱정을 견디고 책을 읽게 한 것은 단 두 가지타고난 이야기꾼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필력과 인간 에드몽 당테스(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본명이다)의 매력 덕분이었다. 행복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절망의 시간을 견뎌 다시 한 번 비상을 꿈꾸는 에드몽 당테스의 행보를 따라갈수록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됐다.


조력자 파리아 은사로부터 교육을 받기 전부터 이미 지중해 3개 국어를 구사하고 명민하고 판단력이 빠르며 훌륭한 항해사이런 설정들을 보다보면 이것이 19세기인이 상상한 먼치킨 캐릭터구로구나싶은 생각이 든다. 200년 전의 프랑스 독자들이 이런 이상적인 근대인의 매력에 이끌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폭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정작 내가 에드몽 당테스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 선천적인 선량함과 이유 있는 원한 사이를 오가는 그의 입체적인 성격, 다시 말해 끊임없이 갈등하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다.


에드몽이 고통받고 갈등하는 장면을 홀린 듯이 읽은 적이 여러 번이다. 그 대목들을 멋들어지게 정리해서 소개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내 빈약한 문장으로 멋을 부리기보단 원문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pp. 181~182.) 샤토 디프의 독방에 갇혀 인간의 손길을 잊어가던 에드몽.

그는 버릇처럼 간수가 새로 오기만 하면 또 얘기를 해보았다. 새로 온 간수가 먼저 사람보다 더 말 상대를 안 해주어도 좋았다. 그 사람이 설령 벙어리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당테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말을 하려고 하면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다.”


(p.183) “행복한 사람에게 기도란 다만 단조로운 무의미한 것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으나, 괴로운 날이 오게 되면, 고통은 불행한 사람에게 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숭고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준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오랫동안 사람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의 두려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언어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무 말이라도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더 이상 나의 힘이나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신을 찾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절박함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이 소설은 에드몽의 고문극이 아닌 에드몽의 복수극이기 때문에 결국 탈옥에 성공한다. 감옥에서 사귄 벗을 여의고 그 시체 주머니에 몰래 숨어서 탈옥을 한 뒤 지나가던 밀수선에게 구조받은 뒤, 에드몽은 오늘의 연도를 묻는다. 의아해하는 선원으로부터 1828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에드몽은 씁쓸한 웃음으로 생각한다.


(p.291) “지난 14년 동안을 하루 같이 감옥 속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19세에 샤토 디프에 들어갔는데 서른셋에 그곳을 나왔던 것이다. 쓰디쓴 미소가 당테스의 입술 위에 떠올랐다.”


14년만에 육지에 발을 디딘 에드몽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이발소였다. 그곳에서 면도와 이발을 부탁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에드몽은 생각한다.


샤토 디프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당테스는 인생에의 첫걸음으로 순조롭고 미래도 행복으로 가득 차서 얼굴에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갸름하던 얼굴은 홀쭉해지고,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입은 결심을 나타내는 듯 꿋꿋하고 동요하지 않는 선이 드러나 있었다. 눈썹은 단 한 가지 생각에 잠긴 듯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고, 그 슬픔 속에서는 때때로 염세와 증오의 암담한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햇빛과 대기를 오랫동안 쬐지 못했던 그의 안색은 윤기가 없었고, 얼굴은 검은 머리로 둘러싸여 마치 북방인 같은 귀족적인 아름다움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가 얻은 심오한 학문은 그 얼굴 전체에 안정된 예지의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알던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버린 인상은 훗날 그가 정체를 숨기고 적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감옥에서 유산 받은 보물지도 덕으로 백만 장자가 되었다고 해서, 시련으로 담금질한 강인한 체력과 심장이 생겼다고 해서 어떻게 14년의 불행이 보상받을 수 있을까? 몬테크리스토 섬의 보물을 찾고 14년 만에 고향 마르세유에 돌아왔을 때, 에드몽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가 살던 거리와 아버지의 집이었다.


유년시절의 갖가지 추억,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지울 수 없는 추억들이, 광장 구석구석, 거리 구석구석마다 떠올랐다. 노아이유 가의 어귀에 와서 알레 드 메랑을 바라보았을 때엔 무릎이 탁 꺾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방에는 아버지가 살던 때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옛날의 헌 가구들, 당테스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그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가구들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잡혀간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사랑했던 약혼자 메르세데스는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에드몽은 아버지의 최후를 듣기 위해 수소문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실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신부로 변장했던 것도 잊고서 단장이 찢어지는 절규를 토해낸다.

 

굶어죽다니!” 신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굶어죽다니! 아무리 비천한 동물이라도 굶어죽지는 않는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들도 마음씨 착한 사람이 빵이라도 한 쪽 던져 얻어먹게 마련인데, 기독교 신자인 인간이 자칭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틈에서 굶어죽다니!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는 없고말고!”


억울하게 아들을 빼앗긴 후 에드몽의 아버지는 자의로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단장이 끊어진다는 고사의 유래는 자식의 죽음을 탄식하는 부모에게서 유래한 것이지만, 어쩐지 에드몽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정도로 세상한테 배신을 당했으면 세상을 미워할 법도 하건만, 본성이 선량한 탓인지 그는 무지막지한 복수귀로 변신하는 대신 정의에는 상을 주고 불의에는 벌을 주는 사도로 자신을 재정의한다.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를 돌보아주고 끝까지 자신의 구명을 위해 탄원해주었던 옛 주인 모렐 가족을 파산에서 구해내고, 갓 탈옥해서 인간에 회의하고 있을 때 사람의 정을 보여준 동료 선원을 남몰래 돕는다. 복수를 행하기 위해 순진하고 너그럽던 면모를 버리는 한편, 여전히 인간적인 정에 흔들리는 모습이 번갈아 나타나는 장면은 갈등하는 인간으로서의 에드몽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p.17) “그는 치명상을 입은 관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싸움 때문에 피가 끓어올라서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감정이 냉각되어 버려서인지, 그것을 보고도 마음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당테스는 지금부터 달려가려고 하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가슴 속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세상은 팡그로스 박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선량한 것도 아니며, 또한 당테스가 생각하던 것처럼 악의에 찬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동료가 죽으면 그 사람 몫의 상여금까지 탈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이 사나이는 이처럼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 당테스는 자코포를 유혹해보려고 했다. 그는 간호의 답례로 자기 몫의 상여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코포는 화를 버럭 내면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에드몽은 자신에게 인간의 선의를 베풀어준 동료에게 그에 걸맞는 보답을 베푼다.


(p.18) “에드몽은 마치 파리아 신부가 자기의 선생이 되어주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자코포의 선생이 되곤 했다. 그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 하늘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책, 즉 신이 창공에 다이아몬드로 써 놓은 저 하늘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자코포가 나같이 시시한 선원이 그런 건 알아서 뭐하누?’하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알 게 뭐야? 자네도 언젠가는 선장이 될 거 아냐? 자네하고 같은 나라(코르시카) 사람인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다 됐는데.“

 

그는 고독 속에서 이 세상에 내던져졌으면서도 때때로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캄캄한 밤, 무한한 침묵 속에서 주께서 내려와 보는 밑을 오직 혼자서 떠다니는 배보다도 더 광대하고 시적인 고독이 있겠는가? 고독은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고, 밤은 그의 공상으로 빛나며……

 

과거의 은인에게 보답을 마치고 난 후, 에드몽은 이제 격렬한 감정을 버리고 복수귀로 화하기 위해 과거를 감춘다. 소설은 이십 년 뒤로 넘어간다. 작위를 사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된 에드몽은 원수의 아들인 알베르를 만나서 계획의 실마리를 열고, 파리의 사교계에 입성하여 적들을 상대로 복수의 거미줄을 짓는다. 그 과정 동안 소설의 시점은 주변인들의 시각에 빙의해서 진행된다. 선한 청년 에드몽 대신 계략적이며 미스테리한 인물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묘사되는 것이다. 작품의 서술 방식 역시 에드몽의 심리와 행동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시각에도 본 그의 행적을 따라간다. 인물들의 가장자리에 존재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의 손 아래서 움직이고, 점잖고 친절하게 웃는 그의 존재 앞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탐욕이나 업보에 이끌려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다만 여전히 모렐 가족처럼 복을 받을만한 선한 복자들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해지는데, 이런 복합적인 면모가 에드몽을 입체적 복수자라고 부른 이유다.





 

2. 정교한 거미줄처럼 진행되던 에드몽의 복수가 급격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4권 후반부터다. 에드몽이 지난 날 자신을 정치범으로 모함하고 사랑하는 약혼자를 빼앗아간 원수 페르낭의 치부를 밝히는 데 성공하자, 페르낭의 아들인 알베르는 대부처럼 따르던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모멸감과 배신감에 떨며 오페라 극장으로 쳐들어온 알베르를 향해 이전까지의 미소를 거두고 더 없이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별러 온 복수를 시작하려는 듯이.


(p.419) “그러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일어서려고도 않고 의자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손만 내밀어, 알베르의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땀으로 축축해지고 꾸겨진 장갑을 빼내면서,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이 장갑은 던진 것으로 생각하고 받겠습니다. 나중에 총알에 싸서 보내드리죠. , 이젠 돌아가시오. 안 그러면 하인들을 불러서 문 밖으로 던져 버리게 하겠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다시 쌍안경을 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사나이는 청동 심장과 대리석으로 된 얼굴을 가진 것이 틀림 없었다.“



원수의 아들이기는 하나 아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알베르를 보면서 에드몽은 수없이 흔들렸다. 죄 없는 그를 불쌍히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바친 복수를 포기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고, 그는 죄 없는 아들을 죽여서라도 그 아비에게 복수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토록 확고한 결심을 무너트린 것은 옛 연인 메르세데스의 등장이었다.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사람, 지금은 원수의 아내가 된 여자가 처음부터 당신임을 알고 있었노라고백하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메르세데스는 에드몽의 인생과 소설의 서사를 관통하는 중요 인물임에도 그전까지 기이할 만큼 등장이 적었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 등장인물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백작이 에드몽임을 알아보았음이 밝혀진다. 동시에 강철 같던 백작의 가면은 벗겨지고 미처 잘라내지 못했던 사랑, 애정, 선량함, 감동 같은 본래 성품이 드러나버린다.


(p.428) “에드몽, 제발 제 아들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백작은 한 걸은 뒤로 물러서며 나지막하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들고 있던 권총을 떨어트렸다.

방금 뭐라고 부르신 겁니까, 모르세르 부인?

당신 이름이에요!부인은 베일을 벗어던지며 말했다. 당신 이름이에요. 저만은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에드몽, 지금 여기 온 사람은 모르세르 부인이 아니에요. 메르세데스에요.

메르세데스는 살아있어요. () 메르세데스만은 당신을 보았을 때, 아니 보기 전에 당신의 목소리만 듣고도 당신을 알아보았으니까요.


그리고 모르세르 백작(페르낭의 작위)에게 잘못이 있다면 남편과 자신만을 벌하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자기를 모함하고 악행의 악행을 거듭해서 백작이 된 자의 이름을 듣자, 백작은 수십 년 전 일개 항해사와 어부와 시골 처녀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 세 사람의 이름을 오랜만에 기억해낸다.


페르낭 얘기시로군요.백작은 신랄하게 비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왕에 우리의 옛날 이름을 되찾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해 내시지요.

 

그리고 메르세데스에게 자기 행동의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 이어진다. 바로 여기서 뒤마가 생각한 복수극의 핵심이자 에드몽의 복수가 독특한 이유가 나오는데, 그는 자신의 복수를 사적 복수가 아닌 신의 대리인으로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흔한 기독교적 후회의 복수극이 아니라 시원시원한 복수극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작은 자신의 복수에 후회하지 않으며 사필귀정의 실현으로 받아들인다.

 

(p.429) “부인께선 지금 혼동하고 계시는군요. 이건 불행이 아닙니다. 징벌이라는 거지요. 모르세르 씨가 쓰러진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겁니다. () 그 프랑스 장교(모르세르)와 바질리키의 달 사이의 문제는 부인 말씀대로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죠. 그리고 제가 설혹 복수를 맹세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프랑스 장교나 모르세르 백작을 향해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어부 페르낭, 즉 카탈로니아 출신의 메르세데스의 남편입니다.


(p.432)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그러한 반역자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않더군요. 스페인 사람들도 그를 총살하지 않았고요. 알리도 무덤 속에 누워 있어, 그 배신자를 처벌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무덤 속에까지 던져졌던 나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을 위해 나는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434) “메르세데스, 그래요. 과연 그 이름을 부르니 내 마음은 아직도 즐겁군요. 나는 슬픈 탄식을 할 때나, 괴로워 신음할 때나, 무서운 절망 속에서나 늘 이 이름을 불러왔습니다. 감방의 짚더미 위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몸이 얼어 붙어서도 이 이름을 불렀지요. 너무 더워서 바닥의 포석 위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이 이름을 불렀지요. 메르세데스, 나는 복수를 해야만 합니다. 난 십사 년이나 되는 세월동안 고통받았고, 십사 년 동안 울면서 저주했으니까요. 메르세데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수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벼락 같은 복수를 다짐한 에드몽의 단 한 가지 실수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인간적인 정이며 사랑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p.436) “당신은 자기가 없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심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의 연적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의 아이를, 내 아이를 죽이려는 것은 본 적이 있어요.

메르세데스의 이 말에는 너무나 짙은 슬픔의 빛이 스며 있었고, 그 어조 역시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그 말과 그 어조를 듣는 백작의 목구멍에서는 급기야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침내 사자(使者)가 고개를 숙였다. 복수를 부르짖던 사람이 굴복하고 만 셈이었다.

뭘 어떡하란 말씀입니까? 아드님을 살려달라고요? 좋습니다. 살려드리죠.

그때 메르세데스가 지른 환성에 백작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런데 백작이 알베르를 살리는 대신에 선택하는 대가란 스스로 자살을 감행하는 것이다.

 

메르세데스, 내가 이 세상에서 당신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나 자신, 즉 내 권위는 다시 말하면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나의 힘입니다. 이 힘이야말로 내 생명이고요. 그 힘을 당신은 단 한 마디로 쓰러뜨려 버린 겁니다. 그러니 난 죽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당신이 용서해 주신 이상 결투는 안 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니, 할 겁니다하고 백작은 엄숙하게 말했다.

, 아드님의 피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제 피가 흐르게 될 뿐이죠.

 

(p.440) 메르세데스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백작이 복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데서 오는 비통하고도 심각한 상념 속에서 깨어나기 전에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모르세르 부인을 태운 마차가 샹젤리제 가의 포석 위를 구르는 소리에 백작이 얼굴을 다시 들었을 때, 앵발리드의 시계는 한시를 알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하고 백작은 생각했다.

복수를 결심한 날, 왜 내가 심장을 뽑아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이 대사가 에드몽 당테스의 삶을 관통하는 글귀이자, 갈등을 경험해본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글귀라고 생각한다. 오래토록 결심하고 별러 온 감정을 결국 놓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면 느껴보았을 한탄이라고. 그래서 이 독백을 좋아한다.

 

(p.441) “무슨 일인가! 그처럼 오래오래 준비하고 그토록 고심해서 세워놓은 계획이 단 한 마디, 단 일격에 단번에 무너지다니! 그래도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오던 내가, 그처럼 자신만만하던 내가, 이프 성에서 그처럼 초라하게 지내다가도 이렇게 위대하게 될 수 잇었던 내가 내일은 한줌의 먼지가 되어버려야 하다니!”


(p.448)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처럼 오래오래 고심해서 열심히 쌓아놓은 계획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계획을 찬성해 주시는 줄 알았던 하느님도 실은 반대해 오신 것일까? 결국 신은 이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단 말인가?

나는 거의 지구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들어올려서, 그것을 마지막까지 가져온 줄 알았는데…… , 십사 년 동안의 절망과 이십 년 간의 희망으로, 신과 같이 된 줄 알았던 내가 다시 운명론자로 되돌아가야 하다니!


이 모든 것은 죽은 줄만 알았던 내 심장이 잠시 잠들어 있던 것에 불과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눈을 떠서 고동치기 시작하여, 한 여자의 목소리에 가슴 밑바닥에서 다시 고통스럽게 들리는 그 고동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손을 들어버린 까닭이다.“

 

(p.444) “하느님!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말했다. 저는 하느님의 명예를 위해서나 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지난 십년 동안 저는 복수를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도라고 자임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 모르세르 이외의 악당들, 당그라르나 빌포르에게, 그리고 모르세르 자신에게 우연의 힘으로 용케 적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처벌을 명령한 신의 섭리가 나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변경된 것이라는 점과, 이 세상에서 모면한 벌이 저 세상, 즉 영구한 내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만 합니다.

 


이 소설에서 복수는 어리석은 미련이나 헛된 아집이 아니다. 에드몽의 여정을 지켜본 독자라면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는 사필귀정의 일환이다. 영혼처럼 사랑한 메르세데스의 부탁에 흔들려 그 계획을 변경하는 결말부마저 에드몽의 선한 본성을 부각시키는 지레로 작용한다.


그는 결국 선한 사람인 것이다. 어린 날 무서운 표지와 뿌리 깊은 증오로 날 소름 돋게 했던 몬테크리스토는 잔인한 악인의 일대기라기보단, 사실 선량한 사람의 투쟁기였다. 동시에 복수극의 전형을 완성한 주인공이었다. 200년 전 뒤마의 손에서 탄생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복수귀의 이야기.

 




혹시나 이대로 에드몽의 복수가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고 권선징악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지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 뒷이야기를 첨부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결투장에 나간 그에게 과거 은인의 아들인 막시밀리앙 모렐이 다가온다.


(p.448) “잠시 후에 객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 손수 문을 여니, 막시밀리앙이 문 앞에 나타났다. 막시밀리앙은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 가량 일찍 온 셈이었다.

너무 일찍 온 것 같네요.하고 모렐은 말했다. 실은 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그랬죠. 전 백작님의 꿋꿋하고 침착하신 모습을 보고 제 정신을 좀 가라앉히려고 이렇게 일찍 왔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이 말을 듣자, 백작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청년에게 손을 내미는 대신 두 팔을 벌렸다.“ (에드몽이 그 복수의 맹세 뒤에 사실은 누구보다도 깊이 사람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지나친 편애일까?)

 

그리고 선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구절처럼, 상황은 영리한 메르세데스의 기지로 반전된다. 메르세데스는 분노를 불태우는 아들 알베르에게 아버지의 업보와 진실을 밝힌 것이다. 어머니의 정직한 성품을 물려받은 것일까? 알베르는 결투를 포기하고 대신 입회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백작에게 용서를 구한다.


(p.459) “저는 백작님께서 에피루스에서 제 아버님(페르낭)이 저지른 일을 폭로한 것을 두고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가 아무리 죄가 있다 하더라도, 백작님께 그를 벌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백작님께는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오늘 이렇게 급히 사죄드릴 생각이 든 까닭은, 페르낭 몬데고가 알리 파샤를 배반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어부 페르낭이 당신을 배신하고 그 결과 당신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불행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백작님, 백작님이 제 아버지에게 복수하신 것은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백작님께서 제 아버지에게 그 이상의 일을 안 하신 데에 대해 자식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마침내 자신의 부당함이 인정받는 순간, 백작은 생각한다.

 

(p.461) “그는 아들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찾아왔던 그 용감한 메르세데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아들을 위해 백작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 이 마당에, 그녀는 그 무서운 가문의 비밀을 고백함으로써 다시 자기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알베르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정을 영원히 앗아가 버린 것이다.”

 

과오가 바로잡히고 선한 자가 정당한 보상을 받는 복수극은 얼마나 속이 시원한가. 내가 무서워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 사실 선량한 사람의 복수극이었다.

 





 

+ 덧붙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타난 나폴레옹 인식과 혁명기의 만화경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되는 시점은 나폴레옹이 1차로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1814년부터 그의 백일천하가 실패로 끝나고 부르봉 왕조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뤄진 1830년 사이를 배경으로 한다. 19세의 에드몽이 보나파르트 당원으로 의심당해서 샤토 디프에 갇히게 되는 전반부까지가 1차 왕정복고기(1814~1828), 돌아온 에드몽이 몬테크리스토섬의 보물을 찾고 세상을 유랑하는 중반부가 2차 왕정복고기, 그리고 파리로 돌아와 복수극의 서막을 올리는 후반부가 18307월 혁명으로 인해 왕정과 민주정이 불안하게 공존하는 10월 왕정 시기에 해당된다. 요컨대 1789 이후로 공화정부, 통령정부, 나폴레옹의 민주적 제정, 복고왕정, 루이 필립의 10월 왕정이 번갈아가며 등장하던 격동의 프랑스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렇게 빠르게 옮겨가는 시대상 속에서 소설은 주인공인 에드몽의 행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틈나는 대로 당시의 시대상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에드몽의 누명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면서 나폴레옹 복권을 기도하는 보나파르트 당의 계획과 이를 진압하려는 왕당파의 반동에 한 장() 이상을 할애하여 길게 서술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이 상세하고 긴 서술이 단순히 작가의 지적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한때 보나파르트 사상에 공감했던 경험 덕분인지, 뒤마는 이런 시대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19세기 전반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가졌던 양가적인 감정을 절묘하게 포착한 것이다.


북쪽의 파리와 남쪽의 마르세유로 프랑스가 양분되어 있던 시절. 1789년 혁명과 그 뒤를 잇따른 나폴레옹의 등장, 왕정복고를 겪으면서 프랑스의 귀족과 평민,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이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혁명 초기 동안 재산을 몰수당하고 친인척이 참수당하기도 한 파리의 왕당파에게 나폴레옹은 당연히 혁명의 악동, 평민 출신으로 황제를 자처하며 민주주의와 제정을 절묘하게 뒤섞은 사기꾼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태어난 곳이자 수도 파리에서 떨어진 상업과 군인의 도시 마르세유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프랑스 남쪽 일천한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군인이 대혁명 전쟁을 치르며 혁명정부에서 승승장구하더니, 종국에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제정을 설립했다. 그렇게 성립된 나폴레옹의 제정에서는 부르봉 시절의 작위나 권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1789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적어도 나폴레옹은 그렇게 주장했다) 새로운 권력층과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했다.


요컨대, 평민 군인으로 시작해 복고 왕정을 누르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1) 주변부 지역에서 태어난 2) 평민 출신의 3) 군인과 부르주아지에게 일종의 성공 신화가 된 셈이다.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자수성가형 사업가 모렐, 군인 막시밀리앙, 밀수업자 베르투치오, 성악가 다니엘라 양 등)이 나폴레옹을 언급할 때 보이는 태도라던가, 심지어 정치적 무당파를 지향하는 에드몽조차도(그는 나폴레옹의 제정이나 부르봉 왕당파나 제대로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모함을 방조했다는 점에서 똑같이 악이라고 본다)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계층 대이동을 언급한다. (앞서 인용한 자코포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그는 하급 선원인 자코포에게 자네도 언젠가는 선장이 될 거 아냐? 자네하고 같은 나라(코르시카) 사람인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다 됐는데라고 독려하며 항해술을 연마하기를 권고한다.)


작중에서 나폴레옹은 에드몽이 수감되어있던 10년 동안 복권에 실패하고 결국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생을 마감하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복고왕정과 10월왕정에서도 혁명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남아있다. 세습귀족이 몰락하고 왕에게 충성하거나 공로를 세운 이들이 새로이 작위를 얻거나 돈으로 작위를 사는 경우가 횡행하는데, 사실상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당장 에드몽은 몬테크리스토섬에서 발견한 막대한 보물로 작위를 사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되었고, 그의 원수인 어부 페르낭이나 회계 당글라르는 각각 군에서의 공로, 투기를 통해 백작과 남작 칭호를 얻는다. 소설에 묘사되는 파리의 정치는 절대군주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귀족 의회와 평민이 주축이 된 언론사와의 견제 사이에서 이뤄진다. 이 같은 숨은 묘사들을 통해 19세기 전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왕당파와 공화파의 끊임없는 줄다리기, 군주제와 민주제의 반복되는 교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프랑스에만 국한된 경험이 아니며, 봉건적 왕정이 근대적 민주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겪는 사회라면 한 번쯤 겪고 넘어가는 보편 경험인 것이다. 200년 전에 쓰인 통속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태어나 자란 사회의 역사를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신문에서 연재됐다는 사실 하나로 쉽게 통속소설로 치부되는 글이, 때로는 어떤 순문학보다도 충실한 사료가 되며 보편적 공감을 일으키는 애정작이 된다. 현대 복수극의 원형을 만들어낸 매력적인 주인공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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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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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바우돌리노 (2000) :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어디입니까

 


광신에 대한 경계(<장미의 이름>), 음모론을 향한 통렬한 풍자(<푸코의 진자>). 에코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3차 십자군 전쟁과 사제 요한의 전설을 집대성한 <바우돌리노>를 통해 그 대답을 내놓았다. 바로 진실과 허구의 경계의 모호함이다.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에코의 작법은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러 번 사용되었지만, <바우돌리노>는 아예 주제를 진실과 허구의 혼동으로 잡고서 에코가 작정하고 사기극을 벌이는 소설이다.


우선 난이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지금껏 읽은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친절한 소설이다.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은 <장미의 이름>보다 친절하고, 사건 전개는 <푸코의 진자>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선적이다. 첫 번째 장인 바우돌리노의 독백을 제외하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에 별 무리가 없다. 아마 <바우돌리노>의 유일한 난관이 제 1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머지 부분들은 술술 읽힌다. (학창 시절에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다가 금방 내려놓았던 것도 아마 제 1 장의 난관을 넘기지 못해서인 듯하다. 그 난관만 무사히 건넜더라면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에코적이면서도 중세적인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후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바우돌리노>는 에코가 일부러 대중을 겨냥하고 쓴 소설이었다고한다. ‘교양있는 지식인 독자를 위한 책이었던 <장미의 이름>보다 대사와 문장을 훨씬 세속적이고 간결하게 편집하고, 복잡한 트릭도 집어넣지 않았다. 그러나 번역자가 지적하듯이 에코의 소설은 문체가 단순하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바우돌리노와 함께 십자군의 세계를 건너는 여정에서도 우리 독자들은 작가가 겹겹이 짜놓은 온갖 전설과 역사의 태피스트리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주인공 바우돌리노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한미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특이한 재능을 두 가지 갖고 있었다. 어느 지방의 말이건 한 번 들으면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거짓말을 해도 언제나 진실처럼 들리는 능력이었다. 그의 친부 갈리아우도는 아들을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꾸짖지만, 훗날 바우돌리노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황제나 귀족처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은 그의 거짓말을 의심하면서도 그 허구에 매료되어 그를 지원하게 된다. 거짓을 말해도 진실처럼 들리는 바우돌리노의 기이한 능력. 그의 정교하고 세밀한 상상력과 화술에 대해서 액자 밖 기록자인 비잔틴의 역사가 니케타스(실존인물이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니케타스는 자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은 사자를 보았다. 대체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 자기 고향 사람들 이야기를 할 때는 농부들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고 군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왕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pp.93~94.)


 

처음으로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을 신용하는 인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붉은 수염(Barbarossa)’ 프리드리히다. 그렇게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실존 인물)과 그의 양아들이 된 바우돌리노(허구 인물)가 긴 모험을 떠나며 시작된다. 이야기 초반부터 이 소설은 허구와 사실의 모호한 경계를 거니는 줄타기 같은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우돌리노는 대체 어떤 거짓말을 지어내서 프리드리히 대왕실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인도 너머 극동에 존재한다는 기독교 왕국 사제 요한의 나라를 만들어냄으로써다. 다시 말해, <바우돌리노>는 프리드리히 왕이 어떻게 하여 3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지와, 중세 유럽 세계에서 사제 요한(Prester John)의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져나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인 만큼 그 이야기는 허구지만, 바우돌리노가 전설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놓고 보자면 12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양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기실,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사제 요한에 관한 단편적인 문헌들을 긁어모아서 약간의 세부를 더하고 편집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음모론과 전설이 그럼직한 문헌 기록의 형태를 띨 때, 허구도 진실로 호도될 수 있다는 걸 생생히 보여줄 뿐이다.


사제 요한의 전설(일명 Prester John 또는 Presbyster Johannes의 전설)은 중세사 교양 수업을 들은 이후 간만에 만나는 이야기다. 인도 너머 극동 지역에 초기 기독교의 한 지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의 한 가지다)가 살고 있으며,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사제인 동시에 왕인 요한이라는 전설이다. 사제이자 왕인 요한이 다스리는 동방의 기독교 국가는 강대하고 풍요로워서 이슬람 세력에 맞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싸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신앙이 12세기 유럽을 휩쓸었다. 이에 더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 말씀 또한 12세기 유럽인들로 하여금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찾아 떠나게 만든 한 동인(動因)이었다.


인도 너머 극동에 있다고 상상된 사제 요한의 왕국. Presbyster Johanness란 글자가 눈에 띈다. 



<바우돌리노>에서는 프리드리히의 숙부이자 조언자인 오토 주교의 유언에서 처음 이 전설이 등장한다.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는 고향인 독일보다 이탈리아에 더 많이 머무르며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꿈꾼다. (에코의 표현에 따르자면) ‘영원히 내분하는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통일하고 자신의 제국 안에 포섭시키기 위해 지진부진한 전쟁을 이어가는 것이다. 어느 새 본국인 독일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더 많은 일생을 보내고, 대왕은 로마 교황과의 풀리지 않는 교권 대 황제권 싸움에 깊이 빠져든다. 늪처럼 말려들기만 하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발을 빼내기 위해 오토 주교는 사제 요한의 전설을 이용하기로 한다. 극동의 기독교 국가인 요한의 왕국을 찾기 위해 군사를 돌린다면, 이탈리아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뿐만 아니라 사제인 동시에 왕인 요한에게서 직접 인정받은 군주로써 로마 교황과의 정당성 싸움에서도 고지를 차지할 수 있으리란 계산에서다.


그러니까 네가 이 왕국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해라. 네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거짓으로 증언하라는 것이다. 분명 페르시아 인들의 땅 너머에 동방 박사들의 후손인 요한이 살고 있을 거야. 프리드리히를 동으로 가게 하려무나. 그쪽에서, 그 어느 왕보다 프리드리히를 빛나게 만들어줄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란다. 밀라노와 로마 사이에 뻗어있는 이 진흙탕에서 황제를 구해다오. 어쩌면 황제는 죽는 날까지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굴지도 몰라. 교황도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이 제국에서 그가 멀어지도록 만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프리드리히는 이 제국의 반쪽짜리 황제로 영원히 남을 게다.” (p.103)

 

이 같은 오토 주교의 유언과 당부는 바우돌리노에게 이어지고, 이후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반평생에 걸쳐서 사제 요한의 전설을구체적으로는 사제 요한이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보내는 서신을 창조해낸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왕국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온 유럽의 제후와 교황, 심지어 비잔틴 황제마저 요한 왕국 찾기에 뛰어들도록 만들 거란 미래뿐이었다. 바우돌리노 자신이 토로하고 오토 주교가 예언했던 것처럼, 바우돌리노가 진실이기를 바랐던 거짓말들은 결국 진실로 화해서 그를 덮치기에 이른다.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것과 내가 보고 싶어했던 것을 항상 혼동한다는 겁니다.” (p.61)


다른 세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결국은 이 세계마저 바꿔 놓는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라고 말하는 바우돌리노의 발언은 <푸코의 진자>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음모론에 희생당한 벨보, 장난삼아 만들어낸 백과사전이 현실세계에 구현되어 버린 <틀뢴, 우크바르>를 연상시킨다.

 

왕이자 사제인 동방박사들, 왕이자 사제인 요한, 이 얼마나 감탄할 만한 인물인가. 그가 지금 꿰매어가면서 프리드리히의 몸 위에 입혀 주고 있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예언이며, 계시이며, 예언이지 않은가!


소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요한 사제의 존재를 증명해 줄 문서, 그가 누구였고 어디에 살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 줄 문서가 있어야 하네. 찾지 못하면 만들게.’“ (pp.197~198.)


심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리플리 증후군이고 허언증인 셈이다. 다만 일반적인 허언증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를 향한 허구이며, 문헌으로 그럴 듯하게 벽돌을 지은 만큼 더 위험한 허언이다. 이토록 바우돌리와 친구들이 정성들여 만들어 낸 가짜 서한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져서 우후죽순으로 사제 요한의 편지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제 누구든지 요한 사제와 다정하게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꾸며 내고 싶어하지. 이제 우리는 약삭빠른 거짓말쟁이들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라고 말하는 바우돌리노의 대사에는 실제 12세기 유럽 기독교도들이 음모론에 바쳤던 열광적인 믿음이 생생히 담겨있다.




 

거짓으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재림시킨 바우돌리노지만, 그 또한 잠시나마 현실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때가 있었다. 젊은 아내 콜란드리나와 결혼한 후 행복한 신혼을 보내는 동안만큼은 잠시 사제의 왕국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추후 반인반수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는 사제 요한의 왕국은 환상일 뿐 중요한 일이 아니라 손을 가로젓기에 이른다. 거짓말투성이인 그의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순간이다. 그러나 진실해져보려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운명은 콜란드리나의 배에서 기형아를 태어나게 하고, 히파티아와는 전란 통에 헤어져버린다. 홀로 남은 바우돌리노는 독백한다.


네가 어떤 일을 꾸며댈 때는 넌 진짜 없는 일들을 꾸며냈지.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되었어. 성 바우돌리노 성인을 나타나게 했어. 동방 박사들이 세상을 돌아다니게 했지. 여윈 암소를 살찌게 해서 네 고향 도시를 구했어. 볼로냐에 박사들이 있다면 그것 또한 네 덕택이야. 넌 가발라의 우고 주교의 개나발 같은 소리를 듣고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왕국을 만들어냈지. 그런 다음에 너는 환상 속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존재로 하여금 실제로 쓴 적이 없는 편지들을 쓰게 했어.


단 한 번, 그 누구보다도 진실한 여자와 단 한 번 진실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넌 실패를 했어. 너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냈어. 그러니까 넌 네 경이의 세계로 숨는 게 나아. 그 세계에서는 적어도 네가 얼마나 경이로울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 (pp.375~376.)


진실을 따를 때마다 비극을 맞이해야 했던 바우돌리노는 대신 가짜 성인을 만들어 내고, 동방박사를 살려내고, 카롤루스 대제를 성인으로 만들고, 요한의 왕국을 실재하는 곳으로 둔갑시킨 다음, 마침내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허구가 현실이 되어 그의 마음과 유럽인들의 마음을 잠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여행을 떠난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많은 일을 겪는다. 아버지처럼 사랑했던 프리드리히 왕을 잃고, 성배를 도둑맞고,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검은 숲 아브카시아와 자갈이 흐르는 계곡 삼바티온을 지나, 요한 왕국의 환관들이 살고 있는 변방도시 픈다페침에 이른다. 산노인 아싸시노의 노예로 잡혀 6년을 보냈다가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다. 십대 시절에 처음 요한의 왕국을 꿈꾸기 시작해서 예순이 될 때까지, 장장 반세기에 걸친 허구의 여행이었다. 4차 십자군의 약탈이 한창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바우돌리노는 비로소 평화를 맞이했을까? 직접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일러둘 수 있는 것은 길고 지리했던 모험 이야기의 끝에 마침내 파편 같던 실마리들이 모여들어 마지막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한 바우돌리노의 모험은, 행복으로 끝날까? 이 책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에필로그에서 역사가 니케타스는 바우돌리노가 들려준 이야기를 과연 자신의 역사서에 포함시켜야 할지, 제외시켜야 할지를 묻는다. 친구 파프누티오스는 대답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불확실한 증언을 믿을 수 없는 걸세. 자네 이야기에서 바우돌리노를 지워 버리게.”

정말 멋진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

이 세상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곧 누군가가,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줄 걸세.”


그리고 정말로,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에코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이 슬픈 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바우돌리노가 모험 중에 만난 신기한 부족들. 중세 유럽인들이 실제로 믿었던 환상 속의 존재들이다.


외발이 스키아푸스



귀큰이



머리가 없는 대신 몸통에 이목구비가 달린 블레미아스.




 

1. 바우돌리노의 모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에코 하나만이 아니다. 작중 등장하는 바우돌리노의 친구 보롱은 소설 말미에서 모든 모험이 끝난 뒤 헤어짐을 말하며 이렇게 기약한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가 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길 걸세. 우리보다 훨씬 더 충실하고 신의 있는 기사들이 나오는 모험 이야기를 말이야.” 그렇게 프랑스의 시인 로베르 드 보롱은 원탁의 기사 이야기와 성배 전설을 결합한 <성배 3부작>을 남긴다. (그렇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어디에 실존인물이 숨어있을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2. <바우돌리노>는 에코의 소설 중에서 낭만적인 대목이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2세기 유럽 세계의 학살을 다루는데, 정작 인물들은 가장 서정적이라니 아이러니하다.

 

a. 오토 주교의 임종과 그를 안심시키는 바우돌리노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워진 게냐?’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는 밤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놀라지 말라고 오토에게 말했다. 정확히 정오가 되었을 때, 오토는 이미 목이 다 잠겨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눈은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신의 요한 사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우돌리노는 오토의 눈을 감겨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p.104)

 

b. 낙오한 프리드리히를 찾아 헤매는 바우돌리노


바우돌리노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재촉해 달렸다. 검을 꽉 쥐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사랑하는 양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바우돌리노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체들이 쌓인 그 평야에서 필사적으로 한 사람의 시체를 찾았고 자기 말에 대답을 하라고 크게 소리쳤다. 바우돌리노는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누워있는 시체들을 하나씩 뒤집어 보기 시작했다. 그는 해질 무렵의 희미한 빛 속에서 사랑하는 황제의 얼굴을 발견하기를 바랐지만 그와 동시에 발견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는 되는대로 걸어서 작은 숲에서 나가다가 우차와 부딪히게 되었다.


혹시 황제폐하 보셨소?’ 바우돌리노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친 듯이 그리고 주저하지도 않고 소리쳤다. ()


바우돌리노는 관목 숲도 살펴보러 갔다. 그곳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한 구의 시체가 똑바로 누워있고 그 위에 세 구의 시체가 엎드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우돌리노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시체 세 구를 들어올렸다. 그는 그 밑에서 피에 물들어 있는 붉은색 수염을 보았다. 프리드리히였다.“ (pp.326~327.)





 

13년 전에 처음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책의 허구와 진실이 분간이 가지 않았던 것처럼, <바우돌리노>의 세계는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놀랍도록 그럴듯하게엮어낸다. 주인공 바우돌리노가 사제 요한의 왕국의 성벽을 하나씩 쌓아가듯, 책 바우돌리노 또한 그 전설이 형성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추적해 나간다. 진실보다 강력한 허구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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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 이어졌던 모험담의 책장을 덮었다. 작년 이맘 때 에코의 작가 노트를 덮었을 때와 비슷한 시점이다. 때마침 절기는 처서를 지나고 올 여름을 혹사시킨 폭염도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 내일은 폭풍이 온다고 한다. 마지막 장정을 덮으며, 에코가 이끌어준 마법의 여름도 함께 끝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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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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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푸코의 진자(1988) : 음모론을 향한 통렬한 풍자

 

미소지니적인 요소와 <장미의 이름>보다 늘어지는 속도가 단점이나, 팔백 년 이상 지속된 성전기사단 음모론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부분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기나긴 썰풀이를 견딜 준비만 되어있다면, 진실이 밝혀질 결말을 기대하며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는 소설. <장미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묘한 마력을 주는 책. 주인공들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가 현실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와 유사한 주제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장미의 이름>보다도 분량이 늘어난 이 책의 줄거리를 어떻게 해야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까?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압축해보자면, 한 마디로 중세 유럽에 존재했던 성전기사단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성전기사단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전설을 재구성해서 하나의 음모론 출판물을 기획하려는 희대의 사기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의 한 영세 출판사에 근무하는 벨보, 카소봉, 디오탈레비 세 사람은 오컬트에 심취한 독자들을 겨냥한 은비학 시리즈를 하나 출판하기로 한다. 핵심이 되는 소재는 수천의 금을 숨겨두고 사라져버렸다는 성전기사단의 전설. 세 출판인은 벨보의 컴퓨터 아빌라파이에 그럴듯한 은비학 용어들을 입력한 다음, 컴퓨터가 무작위로 인과관계를 산출해내는 방법을 통해서 이 기막힌 사기극을 구성해낸다. 컴퓨터를 이용한 무작위 관계성 추출에 더해서, 문헌학을 전공한 카소봉의 방대한 문헌지식이 뒷받침되자 이들의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유럽에 흩어진 오컬트 추종자들을 벌떼처럼 끌어모으기에 이른다.


여기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좋으련만. 편집자라는 소명 때문에 평생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본 적이 없던 벨보는 난생 처음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이 허구의 전설에 스스로 매료되고 만다. 아울러 <너울 벗은 이시스>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한 음모론자들은 세 명의 출판인에게 비밀을 밝혀내라며 현실 세계에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허구로 만들어낸 세계가 사실로 호도되는 순간이다. 벨보와 카소봉, 디오탈레비는 존재하지 않는 책 하나를 만들어내면 그 책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알았으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음모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다른 책이 다루는 주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확증하는 셈이 되고, 그게 곧 <>이 되는 거 아닙니까? 독불장군의 독창성이라는 거, 그거 사실 없는 겁니다.” (p.499)


상징의 이어달리기. 한 상황이 다른 상징의 이름을 댈 뿐, 전거(典據) 같은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p.946)


교차 검증되지 않은 무비판적 인용과 전거가 어떻게 음모론과 오류를 재생산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가 인용과 상호 전거가 만들어내는 음모론에 대한 풍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짐을 주었다. <이것은 성전 기사단 비밀을 캐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위 한 마디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를 한 마디로 함축한다.

 

그런데 음모론 창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들은 어느 새 자신이 편집하고 있는 총서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허구가 현실세계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에의 욕망에 불탔던 벨보가 가장 먼저 그 경계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인입니다. 장미 십자단 선언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선언문이 가짜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요? 우리가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도 가짭니다.”

하긴 그렇군. 그걸 잊고 있었네.” 벨보가 중얼거렸다. (p.698)

허탈한 벨보의 혼잣말.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고 강력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천의 얼굴을 가진 헤르메스 신의 정신은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p.777)


여기서 등장하는 헤르메스 정신이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개념 사이에 인위적으로 관련성을 부여함으로써 만물을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말인즉 음모론자들의 원동력이다. 상징이 모호할수록 대중은 그 상징을 더 경외하게 되고, 믿게 된다. 모든 것이 허구일 뿐인데도. 일견 박학다식해보이는 세 편집자의 거짓 놀음을 통해서 에코는 음모론자들의 사고를 풍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상의 두 권 분량을 할애해서 세 출판인의 음모론 총서 제작기를 숨 가쁘게 달려가다가, 비로소 3권에 들어서야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카소봉의 아내 리아다. 리아는 사료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통해서 성전 기사단 전설의 발단이 되는 프로뱅의 밀지의 진실을 밝혀낸다. 성전 기사단이 마지막 재보를 숨겨놓은 비밀지도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속칭 프로뱅의 밀지라는 것이, 사실은 프로뱅 지역 상인들의 단순한 배달 명세서였을 뿐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속이 다 시원해지는 장이다. 리아는 프로뱅 관광책자에 소개된 그 지역의 간략한 역사와 엄밀한 사료 분석에 근거해서 성전 어쩌구하던 밀지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배달 명세서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한다.


당신네 계획은 전혀 시적이지 못해요. <일리아스>는 명쾌하고 투명하지만, 당신네 장미 십자단 선언문은 명쾌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아요. 호메로스에게는 비밀이 없지만 당신네 계획은 비밀과 모순투성이에요. 바로 이 때문에 당신들은 이 비밀과 모순을 자기네들과 동일시할 준비가 되어있는, 불건전한 사람들(=음모론자)을 무수히 찾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요. 속임수를 조심해야 해요. 자주 쓰면 사람들이 믿어버린다고요.” (pp.963~964.)

 

리아의 대사는 음모론에 심취하는 대중과, 그런 음모론을 부추기는 문헌 제작자들 모두에게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주인공 삼총사는 장난삼아 위작을 만들어내고 음모론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진짜 같은 역사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위작의 세계는 음모론에 열광하는 대중을 끌어들이면서 마침내 <계획>을 세운 삼총사들에게 총구를 겨누기에 이른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총사 중에서 가장 허영심이 강했던 벨보는 수중에 보유하지도 않은 성전기사단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며 음모론자 앞에서 허풍을 터트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 바람에 음모론 신봉자들에게 납치당해서 실존하지도 않는 <지도>를 실토하라며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두 갈래로 갈려서 지도의 실존에 대해 얼토당토 않는 설전을 벌이는 음모론자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벨보는 마지막으로 제정신을 차린다.


내가 보기에 벨보는 두 적대 세력이 논쟁을 들으면서, 세 영매의 시체를 보면서, 몸부림치면서 깩깩거리는 이슬람교 탁발승 영창단을 보면서, 엉클어진 고위 사제들의 차림새를 보면서 문득 자기의 천부적인 자질, 즉 부조리한 것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자질을 회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자질을 회복하는 순간부터 그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p.1056)


그렇게 풍자할 줄 아는 능력을 되찾은 벨보는, 소설 내내 겁쟁이처럼 움츠리던 모습을 떨쳐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멋지게 한 마디를 던진다.

“Ma gauta la nata (마개를 뽑아 헛바람 좀 빼시지).” (p.1059)


이 거절의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벨보는 광인 무리의 소동에 휩쓸려 진자 줄에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카소봉은 평한다. ‘평생 인생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벨보는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만든 <계획>의 주인이 됨으로써 진짜 주인공이 되었다.


벨보가 죽음으로써 호도된 음모론 대중들은 또 몇 세기 동안이나 지도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이로써 천박하고 감상적인 욕망을 온전히 지키게 된 셈이다.”



성전기사단의 행방, 지구공동설, 히말라야에 숨은 샹그리라의 신화, 산노인 아싸시노의 성채, 토라의 수를 헤아리는 카발라 비경(秘經). 어지러이 등장했던 서양 중근세의 수많은 신비주의는 다만 독자를 현혹하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베일을 걷어낸 후 밑바닥에 남은 것은 음모론을 향한 작가의 통렬한 비웃음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야말로 여러 세기에 걸쳐 그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p.1097)


오늘 내가 한 생각을 모조리 여기 적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랬다 해도 <그들(음모론자)>은 내 글을 읽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괴상한 이론을 유추해 내고, 내 글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밀지를 해독한답시고 세월을 보낼 테지.”


침묵하고 있어도 침묵의 배후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테니까. 워낙 그런 사람들이다. 계시에 눈이 먼 사람들. 말후트는 말후트일 뿐이다. 그것뿐이다.” (p.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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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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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에코의 소설 두 권을 동시에 읽고 있다. 그중에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독파 중인 <바우돌리노>의 감상을 메모하다가, 이왕 쓰는 김에 지금까지 읽은 에코의 책에 관한 간단한 추천을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아라고 자칭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너무 많지만, 또 에코의 소설은 중세에서 시작하여 20세기를 지나 긴 시간축을 넘나들지만, 그래도 중세 유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1980) : 광신에 대한 경계


 

십삼 년 전 처음으로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는 책의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화자가 우연한 기회에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手記)를 발견했다고 설명하는 서문부터가 너무 그럴 듯해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라서 진행되기 때문에 현실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나는 상권의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인 윌리엄과 아드소 수사가 미궁의 입구를 발견하기 전까지도 철썩 같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로 믿었더랬다.


<장미의 이름> 독일어판을 번역한 데 융은 에코의 소설을 일러서 <교수 소설Professorenroman>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피력하는데,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역사 추리 소설이라고만 부르기에 에코의 소설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너무나 흐릿하고, 박학다식하고, 지나치게 역사 같다. <장미의 이름>을 읽다 보면 중세 유럽의 교회사 개론 정도는 마스터할 수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에코는 익히 알려진 대로 썰 푸는 솜씨가 현란하기 때문에(박사학위논문을 소설처럼 썼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일단 이야기의 궤도에 올라타고 나면 이 사람이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1,200쪽이 진짜와 거짓의 촘촘한 거미줄이라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중세사가(이자 기호학자)가 소설을 쓰면 어떻게 될까? <장미의 이름>은 이 질문에 대한 에코의 첫 번째 답변이었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다. 14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방인 수사 두 명이 그 범인을 추적한다. 일곱 명의 피해자들은 저마다 숨기고 있는 사연들이 있으며, 범죄의 흔적은 모두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을 가리킨다. 세계를 본뜬 장서관의 미궁 안에서 두 수사는 어떻게 길을 찾고, 범인을 가려낼 것인가? 그리고 이 같은 기본 줄거리 사이사이로 14세기 교황권 대 황제권 논쟁, 가톨릭 분파 내부의 이념 대립이 촘촘히 얽혀들어 소설을 꾸려낸다.

<장미의 이름>의 유명세를 듣고 책을 집어들었다가 결국 내려놓는 독자들은 보통 두 지점에서 읽기를 그만두는 것 같다. 첫 번째 지점은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빌려서 14세기 당시 서유럽 수도원의 생태를 설명하는 상권 초반부다. 여기가 대략 백 페이지 정도 된다. 초입부터 몰아치는 전개를 택하는 추리 장르와는 다르게, 느릿하고 여유로운 속도다. (그러나 다른 에코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감이 올 테지만, <장미의 이름>은 정말 빨리 본론이 등장하는 편이다.) 두 번째 지점은 하권 초반에 등장하는 우베르티노와 미켈레의 기나긴 이단 논쟁이다. 족히 두 장()은 차지한다. 심지어 장서관의 비밀이 드디어 풀리려는 지점에서 탁 끈이 끊어진다. 다섯 번째 희생자까지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범인의 향방과는 관계가 먼 중세 가톨릭의 이단 논쟁이 길게 등장하니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지칠 법도 하다. 사실 나도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을 다섯 번 정도 정독했지만, 이 이단 논쟁 대목에 이르면 거의 뛰어 넘겼다. 그러니 부담스럽다면 일단 이 부분을 제끼는 편을 추천한다. (누구 말처럼 <레 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 <피네간의 경야>를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빠른 전개를 최고로 치는 독자들은 간혹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시작할 거면 쓰지 말라고 혹평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 평가를 볼 때면 개인적으로는 에코가 작가 노트에서 밝힌 다음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려주고 싶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게 낫다.”


"한 독자가 소설의 처음 백 페이지라고 하는 잠재적인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거기에 이어지는 것을 읽어낼 만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의 모두(冒頭)에다 백 페이지의 잠재적인 난관을 매설하는 것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는 작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중 발췌.)


사람에 따라서는 오만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모든 독서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호흡 배우기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필체, 다른 스타일, 다른 사고를 이야기하는 각양각색의 책을 넘나 들려면 첫 장에서는 어느 정도 그 책의 행보에 수긍하고 산세를 익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코의 항변을 너무 까다롭다고 비판하지 말고 일단 첫 백 페이지를 천천히 걸어보시라. 그의 자신감이 허위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에코 소설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장미의 이름>으로 시작할 것을 추천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장미의 이름>에는 이후 에코의 책에서 등장할 중심적 사고들이 한 번씩 언급된다. ‘미소를 모르는 독선에 대한 경고, 진실과 거짓이 분간되지 않는 세상, 책을 이야기하는 책, 내분하는 이탈리아의 역사 등등. 그리고 도서관, , 다시 도서관. 책과 도서관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유를 제치더라도 바로 책에 관한 이야기인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장미의 이름>은 이후 발표되는 에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면모가 강한 작품이다. 연쇄 살인 사건과 수수께끼의 미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소설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대목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한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검증하게 하고 ()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의 이름> 한국어판의 또 다른 장점은, 고 이윤기 번역가의 세심한 주석에 있다. 번역자는 93년에 처음 번역본을 낸 뒤, 끊임없는 수정을 거치며 현재의 판본을 내기에 이르렀다. 초판에서의 번역이 허술했던 것을 오래도록 안타까워 하다가, 이곳저곳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주석과 주해를 통해 보강한 것이다. 그 결과 <장미의 이름>의 수많은 번역본 중에서 한국어판 번역은 손에 꼽을 만한 정확도를 가지게 되었다. 가령 영문판 번역의 경우, 원판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틴어 경구, 이탈리아 속어, 프랑스 속어, 독일어 속어 및 중세 교회 텍스트에 관한 번역과 출처를 누락했기 때문에 교양 있는 일반 독자들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즐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어판의 경우, 성실한 번역가와 다른 많은 전공자들의 도움으로 상세한 주해가 달린 덕분에 그 내용과 감성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에코가 그려내는 중세 유럽을 질 좋은 번역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추천한다. (고 이윤기 번역가의 선례를 따라서일까? 이후 한국에서 발간되는 에코의 책들은 문학, 비문학 가릴 것 없이 모두 주해가 자세하고 섬세한 편이다. 가끔은 주석만 읽어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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