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푸코의 진자(1988) : 음모론을 향한 통렬한 풍자

 

미소지니적인 요소와 <장미의 이름>보다 늘어지는 속도가 단점이나, 팔백 년 이상 지속된 성전기사단 음모론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부분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기나긴 썰풀이를 견딜 준비만 되어있다면, 진실이 밝혀질 결말을 기대하며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는 소설. <장미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묘한 마력을 주는 책. 주인공들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가 현실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와 유사한 주제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장미의 이름>보다도 분량이 늘어난 이 책의 줄거리를 어떻게 해야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까?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압축해보자면, 한 마디로 중세 유럽에 존재했던 성전기사단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성전기사단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전설을 재구성해서 하나의 음모론 출판물을 기획하려는 희대의 사기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의 한 영세 출판사에 근무하는 벨보, 카소봉, 디오탈레비 세 사람은 오컬트에 심취한 독자들을 겨냥한 은비학 시리즈를 하나 출판하기로 한다. 핵심이 되는 소재는 수천의 금을 숨겨두고 사라져버렸다는 성전기사단의 전설. 세 출판인은 벨보의 컴퓨터 아빌라파이에 그럴듯한 은비학 용어들을 입력한 다음, 컴퓨터가 무작위로 인과관계를 산출해내는 방법을 통해서 이 기막힌 사기극을 구성해낸다. 컴퓨터를 이용한 무작위 관계성 추출에 더해서, 문헌학을 전공한 카소봉의 방대한 문헌지식이 뒷받침되자 이들의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유럽에 흩어진 오컬트 추종자들을 벌떼처럼 끌어모으기에 이른다.


여기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좋으련만. 편집자라는 소명 때문에 평생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본 적이 없던 벨보는 난생 처음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이 허구의 전설에 스스로 매료되고 만다. 아울러 <너울 벗은 이시스>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한 음모론자들은 세 명의 출판인에게 비밀을 밝혀내라며 현실 세계에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허구로 만들어낸 세계가 사실로 호도되는 순간이다. 벨보와 카소봉, 디오탈레비는 존재하지 않는 책 하나를 만들어내면 그 책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알았으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음모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는 다른 책이 다루는 주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확증하는 셈이 되고, 그게 곧 <>이 되는 거 아닙니까? 독불장군의 독창성이라는 거, 그거 사실 없는 겁니다.” (p.499)


상징의 이어달리기. 한 상황이 다른 상징의 이름을 댈 뿐, 전거(典據) 같은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p.946)


교차 검증되지 않은 무비판적 인용과 전거가 어떻게 음모론과 오류를 재생산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가 인용과 상호 전거가 만들어내는 음모론에 대한 풍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짐을 주었다. <이것은 성전 기사단 비밀을 캐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위 한 마디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를 한 마디로 함축한다.

 

그런데 음모론 창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들은 어느 새 자신이 편집하고 있는 총서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허구가 현실세계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에의 욕망에 불탔던 벨보가 가장 먼저 그 경계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인입니다. 장미 십자단 선언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선언문이 가짜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요? 우리가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도 가짭니다.”

하긴 그렇군. 그걸 잊고 있었네.” 벨보가 중얼거렸다. (p.698)

허탈한 벨보의 혼잣말.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고 강력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천의 얼굴을 가진 헤르메스 신의 정신은 이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p.777)


여기서 등장하는 헤르메스 정신이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개념 사이에 인위적으로 관련성을 부여함으로써 만물을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말인즉 음모론자들의 원동력이다. 상징이 모호할수록 대중은 그 상징을 더 경외하게 되고, 믿게 된다. 모든 것이 허구일 뿐인데도. 일견 박학다식해보이는 세 편집자의 거짓 놀음을 통해서 에코는 음모론자들의 사고를 풍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상의 두 권 분량을 할애해서 세 출판인의 음모론 총서 제작기를 숨 가쁘게 달려가다가, 비로소 3권에 들어서야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카소봉의 아내 리아다. 리아는 사료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통해서 성전 기사단 전설의 발단이 되는 프로뱅의 밀지의 진실을 밝혀낸다. 성전 기사단이 마지막 재보를 숨겨놓은 비밀지도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속칭 프로뱅의 밀지라는 것이, 사실은 프로뱅 지역 상인들의 단순한 배달 명세서였을 뿐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속이 다 시원해지는 장이다. 리아는 프로뱅 관광책자에 소개된 그 지역의 간략한 역사와 엄밀한 사료 분석에 근거해서 성전 어쩌구하던 밀지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배달 명세서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한다.


당신네 계획은 전혀 시적이지 못해요. <일리아스>는 명쾌하고 투명하지만, 당신네 장미 십자단 선언문은 명쾌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아요. 호메로스에게는 비밀이 없지만 당신네 계획은 비밀과 모순투성이에요. 바로 이 때문에 당신들은 이 비밀과 모순을 자기네들과 동일시할 준비가 되어있는, 불건전한 사람들(=음모론자)을 무수히 찾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요. 속임수를 조심해야 해요. 자주 쓰면 사람들이 믿어버린다고요.” (pp.963~964.)

 

리아의 대사는 음모론에 심취하는 대중과, 그런 음모론을 부추기는 문헌 제작자들 모두에게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주인공 삼총사는 장난삼아 위작을 만들어내고 음모론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진짜 같은 역사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위작의 세계는 음모론에 열광하는 대중을 끌어들이면서 마침내 <계획>을 세운 삼총사들에게 총구를 겨누기에 이른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총사 중에서 가장 허영심이 강했던 벨보는 수중에 보유하지도 않은 성전기사단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며 음모론자 앞에서 허풍을 터트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 바람에 음모론 신봉자들에게 납치당해서 실존하지도 않는 <지도>를 실토하라며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두 갈래로 갈려서 지도의 실존에 대해 얼토당토 않는 설전을 벌이는 음모론자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벨보는 마지막으로 제정신을 차린다.


내가 보기에 벨보는 두 적대 세력이 논쟁을 들으면서, 세 영매의 시체를 보면서, 몸부림치면서 깩깩거리는 이슬람교 탁발승 영창단을 보면서, 엉클어진 고위 사제들의 차림새를 보면서 문득 자기의 천부적인 자질, 즉 부조리한 것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자질을 회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자질을 회복하는 순간부터 그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p.1056)


그렇게 풍자할 줄 아는 능력을 되찾은 벨보는, 소설 내내 겁쟁이처럼 움츠리던 모습을 떨쳐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멋지게 한 마디를 던진다.

“Ma gauta la nata (마개를 뽑아 헛바람 좀 빼시지).” (p.1059)


이 거절의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벨보는 광인 무리의 소동에 휩쓸려 진자 줄에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카소봉은 평한다. ‘평생 인생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벨보는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만든 <계획>의 주인이 됨으로써 진짜 주인공이 되었다.


벨보가 죽음으로써 호도된 음모론 대중들은 또 몇 세기 동안이나 지도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이로써 천박하고 감상적인 욕망을 온전히 지키게 된 셈이다.”



성전기사단의 행방, 지구공동설, 히말라야에 숨은 샹그리라의 신화, 산노인 아싸시노의 성채, 토라의 수를 헤아리는 카발라 비경(秘經). 어지러이 등장했던 서양 중근세의 수많은 신비주의는 다만 독자를 현혹하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베일을 걷어낸 후 밑바닥에 남은 것은 음모론을 향한 작가의 통렬한 비웃음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야말로 여러 세기에 걸쳐 그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p.1097)


오늘 내가 한 생각을 모조리 여기 적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랬다 해도 <그들(음모론자)>은 내 글을 읽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괴상한 이론을 유추해 내고, 내 글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밀지를 해독한답시고 세월을 보낼 테지.”


침묵하고 있어도 침묵의 배후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테니까. 워낙 그런 사람들이다. 계시에 눈이 먼 사람들. 말후트는 말후트일 뿐이다. 그것뿐이다.” (p.1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