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디어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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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炎上(엔조)'라는 단어가 있다. 유명인이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고, 악플이 들끓는 것을 가리킨다. '최애'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요즘은 공중파 예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쓰곤 하니까. '최애'의 '애(愛)'는 연인 사이에 감도는 간질간질한 느낌보다는 경애나 충성심에 가깝다. 아이돌을 비롯해 배우, 캐릭터, 음식 등 폭넓게 쓰인다.


이 두 단어를 합쳤다. 소설 <최애, 타오르다>는 "최애가 불타버렸다. 팬을 때렸다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아카리의 최애는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まざま座) 멤버 우에노 마사키다. 여론이야 안 봐도 뻔하지만 아카리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현생'이 녹록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아카리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르바이트할 때도 실수를 연발한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두 치수 정도 큰 옷을 입은 듯 버거운 일상. 그런데도 아카리는 '어떻게 하면 최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만 생각한다.


작가 우사미 린은 올해 1월 <최애, 타오르다>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1999년에 태어나 올해로 스물한 살.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을 쓴 와타야 리사, <뱀에게 피어싱>을 쓴 가네하라 히토미에 이어 세 번째로 어린 나이다.


'덕질을 소재로 MZ 세대 작가가 쓴 소설이라.' 읽기 전만 해도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하지만 덕질에 대한 묘사와 아카리의 SNS 피드는 현실적이나 날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덕후 DNA'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최애가 사라지면 다른 최애는 새로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아카리와 달리, 내 덕질은 적립식이다. 현생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열심히 덕질하다가,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갈아탄다. 사고라도 치지 않는 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 문득 떠오르면 근황을 찾아보고 흐뭇해한다.


그래서일까. 첫 문장을 읽자마자 다사다난한 '덕질 연대기'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최애캐가 생기면 성우가 혐한 논란에 휩싸이고, 운동선수를 응원하기 시작하니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고, 음색이 딱 내 취향인 가수는 소속사가 말썽이고, 개그 코드가 잘 맞는 예능인은 사생활 논란으로 구설에 오른다. 언제부턴가 내 입버릇은 '우리 모두 2D를 팝시다'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문단의 첫머리로 돌아간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서 최애의 모든 행동을 믿고 떠받드는 사람도 있고 옳고 그름을 구분 못 하면 팬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최애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해서 작품에는 흥미 없는 사람, 그런 감정은 없지만 최애에게 댓글을 보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사람, 반대로 작품만 좋아하고 스캔들 따위엔 전혀 관심 없는 사람, 돈 쓰는 데 집중하는 사람, 팬끼리 소통하는 걸 즐기는 사람.


'덕질'이라는 단어 자체는 널리 알려졌지만, 아이돌의 열애설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볼 때마다 아직 많은 이들이 덕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유사 연애를 하는 덕후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작중에서 아카리의 친구인 나루미는 지하 아이돌을 덕질한다. "날 기억해주고 무대 뒤에서 만날 수 있고, 어쩌면 사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카리는 자신의 덕질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나는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콘서트 같은 현장도 뛰지만, 굳이 말하자면 있는 듯 없는 듯한 팬으로 남고 싶다. 박수를 보내는 일부가 되고, 환성을 지르는 일부가 되고, 익명의 댓글을 남겨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렇다면 아카리는 무엇을 위해 덕질하는 걸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아니다. 아카리에게 덕질은 '척추'나 다름없다.


나는 역행하고 있다. 무슨 고행이라도 하듯이 나 자신이 척추에 집약된다. 무의미한 것을 깎아내고 척추만 남는다.


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아카리는 어딘지 모르게 붕 떠있다.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잰걸음으로 곁을 스쳐간다. 의욕이 일지 않는다. '힘내'라고 해 봐야 낼 힘이 없다. 다시는 오지 않을 학창 시절이라는 둥,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편하다는 둥…. 어른들이 하는 얘기는 하나같이 연기처럼 모호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부드러운 넝쿨손을 감을 막대기인데.


누군가는 덕질을 가리켜 '현실 도피'라 할 테지만, 미래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덕질이 곧 현실이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내 학창 시절이 떠올라 "왜 좀 더 영악하게 굴지 못하는 걸까." 마음이 답답했다. 담임이 불렀을 때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어디서 주워들은 매뉴얼을 늘어놓으며 어물쩡 넘어갈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임기응변' 역시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내 '척추' 역시 덕질이고 글이었다.


결국 아카리는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SNS 속 사람들은 현생을 살고, 학교 친구들은 수험생으로서 치열한 나날을 보낸다. 반면 아카리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다. 최애는 아역 배우 시절, 연극 '피터 팬'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연극은 아카리의 입덕 계기가 되었다. 연극을 보며 아카리는 생각했다.


무게를 짊어지고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롭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누군가가 힘주어 말해준 것 같았다.


소설은 덕질의 옳고 그름을 설득하지 않는다. 아카리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학교를 자퇴하는 것도 덕질 때문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면, 덕질의 메커니즘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사랑 방식을 되짚어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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