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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노트 ㅣ 움직씨 퀴어 문학선 1
구묘진 지음, 방철환 옮김 / 움직씨 / 2019년 5월
평점 :
2019년 5월,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동성혼을 법으로 인정했다. 그 배경에는 한 편의 소설이 자리하고 있다. 대만 작가 구묘진(邱妙津)의 《악어 노트》(방철환 옮김, 움직씨, 2019)다. 소설은 출간 이듬해인 1995년 중국시보(China Times) 문학상을 받았으며, 2017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어 뉴욕 출판계에 충격을 안겼다. 보라색 표지에 초록색으로 쓰인 문구는 ‘언더그라운드 퀴어 컬트 정전’. 만만치 않은 책일 거란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악어 노트》는 주인공 라즈(拉子)가 대학교 졸업장을 받는 장면으로 막을 연다. ‘라즈’는 본명이 아니다. ‘선동하는 사람’ 내지는 ‘리더’라는 의미로 후배가 붙인 별명인데, 이 작품의 영향으로 대만에서 레즈비언을 일컫는 단어로 쓰인다고 하니 퍽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라즈는 4년여간의 대학 생활을 뜯어낸 낱장에 번호를 붙여 늘어놓는다. 뚜렷한 기승전결 없는 ‘노트’ 속에서 그가 사랑한,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스쳐 지나간다.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여자 수령.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세간의 등쌀에 못 이겨 서로에 대한 마음을 한때의 추억으로 묻어 두는 탄탄과 지유. 남녀 모두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진심은 내보이지 않는 남자 몽생. 라즈를 가엾이 여겼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던 여자 소범.
라즈는 자신이 남들과 다른 ‘악어’라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알이 부화할 때 주변 온도에 따라 암수가 결정되는 악어는 기존의 이분법적 성별 구분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성 소수자를 의미한다. 《악어 노트》는 라즈의 대학 생활과 ‘악어’의 생태를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악어’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하루 종일 그를 옥죄던 사람의 옷을 벗는다. 사람들은 ‘악어’에 대해 멋대로 상상하고, 흥미를 보이고, 소문을 퍼뜨리고, 내쫓는다. 작품은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악어’의 생태는 무엇이 바뀌었는가.
‘악어’는 작가인 구묘진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구묘진은 《악어 노트》의 배경인 국립타이완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그는 철학자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밑에서 임상심리학과 여성학을 공부했다. 엘렌 식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거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성별 이분법에 맞서는 한편 모든 여성을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
라즈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물짓고, 세상의 편견에 아파한다. 수령과 이별했을 때는 잠깐이지만 “나를 진정한 여자아이로 바꿔 보기로”(265쪽) 마음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라즈가 자신을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생각해서? 문제는 예외도, 개성도 존중하지 않는 ‘양자택일’이다. ‘남자’ 혹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분법적 성별은 까마득할 만큼 오래도록 기능해 온 모양 틀이다. 우리는 이 모양 틀 앞에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잘려나간 반죽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구시대적인 잣대로 가늠하기에 라즈는, 구묘진은 너무도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당신이 그러하듯이.
구묘진은 《악어 노트》로 대만 문단의 주목을 받지만, 다음 해인 1995년 《몽마르트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 《몽마르트르 유서》(방철환 옮김, 움직씨, 2021)는 파리, 도쿄,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하는 서간체 소설로, 올해 4월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다. 보듬어주고 싶은 ‘악어’의 편지가 시공을 넘어 우리 앞에 도착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헤이, 친애하는 악어야, 안녕?”(122쪽) 습관처럼 잘 지낸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항상 여자를 사랑했고, 그것이 바로 나의 내부에 있는 도안이야. - P195
"내가 말한 건 딱 두 가지야. 평등과 진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너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도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하니까. 또한 모든 일은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변심했으면 변심한 대로. 반죽음이 되도록 싸울지언정 서로를 기만하지 말자고 했단다." (중략) "초광, 양성적인 남자끼리 만나면 충동할 염려는 없나요?" "하나를 바꿔 함께 산다면 사실 쉬운 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와 함께하면 우리는 동시에 상대의 남자이면서 여자로 살 수 있거든!"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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