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사함으로 > 유홍준, 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 2012.10.16
여유 있게 도착한 광진구청은 이미 분주한 분위기였다. 유홍준 교수님과의 만남 행사와 더불어서 광진구에서 운영하는 답사포럼(?)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유홍준, 진짜 제주를 말하다. /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어제, 오늘 & 내일. 이라는 예상하고, 예고되어 있던 제목을 모두 뒤로하고, 강의의 내용은 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이었다.
학전에서 진행하는 한국미술사강의 가고 싶었는데, 못 가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자리였다. 강의 내용을 정리해둔다.
유홍준, 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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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 @ 광진구청 제1별관 3층 대강당 2012년 10월 16일 (화) PM 7시
명작(名作)은 그 시대 문화 능력의 소산. 그 시대 최고의 정성, 최고의 기술, 최고의 재력. 최고의 문화능력이 필요하다.
경주시내 고분군.
신라 350년~500년. 150년 간 만들어진 것이 고분이다. 그 이전의 마립간 시대와 법흥왕, 진흥왕 시대인 500년 이후에는 호화분묘를 만드는 대신 지상에 사찰 건축에 집중하였다.
고대 미술 고분 → 불교미술로 변화.
신라 시대 이후로 고분이 도굴없이 보존되다가 1920년대 부터 고분의 도굴이 시작되었다.
① 1921년 경주역 건설하면서 금관, 금팔찌 one set 등 금만 7.5kg 이 출토 되었다. → 금관총(金冠塚)
금관총(金冠塚)의 금관 (국보 제87호)
※ [유홍준의 국보순례 33 신라금관] 조선일보 2009.11.1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11/2009111101531.html
② 1923년 금령총(金鈴塚).
③ 서봉총 (瑞鳳塚)
1926년 스웨덴의 고고학을 전공한 왕자가 중국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다. 그래서 금강산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금강산을 만드는데 반드시 하루를 썼을 것이다." 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왕자가 경주 고분을 출토하는데 함께 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서봉총이다. 서봉총의 '서'자(字)가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의 '서(瑞)'자 이다.
일제 강점기 위의 3개의 고분이 출토 되었다.
1971년 경주 교동 고분군 출토. 155개의 고분 중 신라시대 down town에 위치하고 있던 고분을 처음으로 출토한 것이다.
④ 천마총(天馬塚)
⑤ 황남대총(皇南大塚) : 38,000 점의 유물 출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국보 제194호): 현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현재성을 갖고 있는 명작 목걸이. → ★ 명작은 이처럼 "현재성" , "역사성" , "민족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1940000,11
천마총
천마?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이다! 그 재료가 자작나무이다. 신라에는 자라지 않던 나무인데, 아마 고구려에서 들여와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교류의 흔적이다.
터키석 팔찌처럼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에 고분미술 "수입상품 편"에서 따로 다루었다.
5세기에 유리잔을 만든 것도 대단한데 심지어 유리잔을 수입까지 하였었다.
9세기 처용의 그림(?), 턱이 긴 서역인의 그림, 경주 성산동 고분군 38호분(?)에서 출토된 가야의 질그릇이 징그럽게 많이 나오는데, 그 그릇 속에 서해에서만 잡히는 물고기의 뼈가 나온다. → 이것 역시도 백제와의 교류의 흔적을 보여준다.
2010년도 있었던 경주박물관의 황남대총전. 황남대총의 유물의 숫자가 58,000점으로 늘었났다. 왜 그랬을까? 끓어진 가슴걸이의 구슬 하나 하나를 세었더니 2,000점이라서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가슴걸이 천마총 목걸이, 보물 619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6190000,37
황룡사
진흥왕, 진평왕 시대를 지나서 선덕여왕 시대 자장율사가 9층 목탑 건축을 제안하였다. "침략하려는 다른 국가들에게 문화능력으로 위세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건물 높이로 27~28층 높이의 목탑이다. 기술자가 없던 신라에서는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 와박사(瓦博士)들을 데려다가 건축하였다.
9층 목탑에는 각층에는 신라가 무찔러야 할 적대적 국가들이 나온다. 모두《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역사 교육이 잘못된 것인지...) 각 층별로 1층부터 일본, 중국, 오월, 탐라, 여진, 말갈 등등... 각 층마다 하나의 적대적 국가가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민족의식",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이렇게 높은 목탑을 피뢰침도 없이 세워 두었으니, 벼락을 자꾸 맞았다. 큰 벼락이면 복구하는데 10년, 작은 벼락이면 1년이 걸려서 복구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1235년 몽고의 3차 침입 때, 화재로 전소되었다.
★ 문화재 복원은 후손된 자들의 의무이다. 그런데 "복원할 문화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재력, 의지, 정신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하다. 황룡사를 복원 비용을 계산해보았는데, 3조원이 넘게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가정의 살림의 관점에서 보면 큰 돈이지만, 한국의 1년 예산과 기금을 합친 국가가 쓰는 돈이 400조원 이다. 7개년 계획으로 매년 5,000억 이면 복원할 비용은 마련되지 않겠는가? 4대강 공사하는데, 하나의 강에 2조원씩 투입했던 것과 비교하면...
그렇다면, 황룡사를 복원하는데 필요한 나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광화문과 숭례문을 복원하는데 남아 있는 춘양목(금강송)을 대부분을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대들보는 캐나다에서 들여온 나무로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청장 시절에 산림청이 갖고 있는 울진군 소광리의 100만평 규모의 춘양목 보호구역을 문화재청 소관으로 하는 MOU를 체결하였다. 앞으로 150년 후에 이곳에서 자란 춘양목으로 황룡사가 멋지게 복원되기를 바란다. 1년에 45cm씩 성장하는 춘양목. 최대 25m까지 성장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건천궁 복원공사와 춘양목 p.110~115 참고.
익산 미륵사
미륵사는 5만 평으로 황룡사의 2배 규모이다.
고대국가의 성립에 필요한 조건 _ ① 영토확장 (탐라국이 국가를 형성할 수 없었던 이유) ② 강력한 율령체계 ③ 종교. 왜 종교가 필요한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에는 매스컴이 없었다."는 학자의 말처럼 종교가 아니고선 어떻게 국민 총화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죽음에 대한 존재론과 인식론.
(※ 열심히 적을 필요 없어요. 전부 책에 있는 내용이니깐... 책을 사서 보면 됩니다.) 웃음
그래서 이룩된 종교가 서양은 기독교이고, 동양은 불교이다. 중국도 불교를 받아들였고, 한국도 마찬가지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단, 인도는 불교가 3,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불교문화는 각 나라의 개별적인 문화로 분류되어야 한다. 불교 문화도 한국의 문화이다.
불교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이다. 진신사리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에는 석가모니의 불경 같은 것을 불상, 탑에 보관하였다.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면서 반드시 사리함을 꺼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의자왕, 3천 궁녀, 낙화암" 처럼 멸망하기 직전의 사실들만 알고 있다. 700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가장 뛰어났을 때의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 역사 교육의 잘못된 점이다. 가장 뛰어났을 때의(전성기) 이야기, 문화를 알아야 한다.
★ 사리함 중에서 졸작이 없다.
금동제 사리내호 사리외호. → 2009년 발굴. 바티칸 유물이라고 해도 믿어 줄만한 명작이다.
http://www.cha.go.kr/korea/news/newsBbzView!view.action?id=155342403§ionId=b_sec_1&mc=NS_01_02
※ [유홍준의 국보순례 72 미륵사 순금사리호] 조선일보 2010.08.1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11/2010081101861.html
백마강 규암 왕흥사터 사리갖춤.
하나의 세트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보물 1767호)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백제미의 진수 왕흥사 사리함 p.356~357 참고.
[유홍준의 국보순례 71 백제 왕흥사 사리함] 조선일보 2010.08.0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04/20100804017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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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289호) & 사리기
[유홍준의 국보순례 74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조선일보 2010.08.2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2013.html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금제 방형 사리합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1230300,35
백제의 문화.
백제는 장인이 존중되던 나라이다.
다리(多利): 공예가 / 아비지(阿非知): 건축전문 기술자 / 와박사(瓦博士): 기와 전문가.
요한 빈켈만, 18세기 그리스 고전미술에 대한 평입니다. :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하다.", "르네상스는 휴머니즘" 이라는 평처럼 위대한 미학자들의 평이 미술품의 가치를 더 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앞으로 천 년에 한 번 나올 위대한 미학자가 우리미술을 멋지게 평해주기를 기대한다.
백제의 미학은 김부식의《삼국사기》의 백제 온조 15년에도 나온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것은 백제의 미학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창덕궁의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집으로 건축할 당시에, 헌종은 단청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기를 희망하였다."고 합니다. 위의 미학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통일신라 시대 감은사지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1359호) 감은사터사리갖춤.
→ 반복하지만 최고의 재력과 정성, 기술의 집합체가 사리함이다. 기술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안 만들면, 안 만들었지 졸작이 없다.
http://j.mp/UY7m6z
고려시대 사리함.
성덕대왕 신종. 주종대박사, 주종차박사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1037자의 명문으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절대자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하였다."
★ 장인이 만든 명작은 Detail이 아름답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점으로, 거의 본능적이다. "God is in the details."
장인 김홍도의 그림은 확대할수록, 감동적이고 멋진 그림이 된다. 반면에 졸작은 확대할수록 결함이 보인다.
경주 불국사
연못에 비춰졌던 모습(?)
불국사 건축 세부관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p.295~300 참고.
① 자연석 위의 장대석. 레빗 (대못) ② 연화교. 극락전으로 가는 길의 연꽃모양의 다리. ③ 소맷돌. 옷의 소매 모양.
※ 현대의 이해할 수 없는 표현과 용어 : ① "잠수교" 우리의 조상들이었으면, 수월교라 했을 것. 수유리도 그런 이름. ②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도 잘못된 표현. 소떼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방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월북", "북송"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백제 금동대향로
[유홍준의 국보순례 70 백제금동용봉대향로] 조선일보 2010.07.2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28/2010072802111.html
향로는 향이 퍼져나가는 모습까지 고려하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세히보면 봉황이 구슬을 턱 아래 괴고 있는 모습이다. 또 뚜껑이 모습을 보면 왜 저런 산봉우리를 만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
★ 향로도 졸작이 없다. 금동향로로는 향을 피울 수 없어서 청자 향로로 향을 피우는 실험을 했었다.
기린 향로. (청자기린뉴개향로 국보 제65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650000,11
※ 전달방식의 문제. <무릎팍도사> <1박 2일> 출연으로 대학교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주변의 평가. 나는 맛도 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처럼 교양 있는 프로그램을 예능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고고한 이미지는 선출직에 나설 일이 있는 분들에게만 필요로 하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경주와 경복궁에 갈 수가 없다. 초등학생들이 하도 알아봐서... (웃음)
고려불화.
원나라, 왜가 가장 많이 약탈해간 문화재가 바로 고려불화이다. 화려하고 섬세하여서 가장 많이 피해를 입은 문화재이다.
http://search.cha.go.kr/srch_new/search/search_top.jsp?home=total
[유홍준의 국보순례 28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2009.10.0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7/2009100701853.html
이 것을 보고서 학생들이 'see through look' 라고 이야기한 그림이다.
인간의 끔찍스런 집요함(?)을 보여주는 법화경 서사보탑도 http://j.mp/PBLP2j
법화경 7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글자로 써서 그림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보탑도의 세부를 보면 한 글자, 한 글자 볼 수 있다.
누가 더 상수일까?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 有上手)라고, 법화경 7권과 이 그림을 대조해봐서 오자 4개가 있다는 것을 연구해서 밝혀낸 분이 있다.
장인적 수련과 연찬
guild (길드) / workshop (작업실, atelier)
master (장인) / journeyman (직인) / apprentice(도제)
masterpiece: 장인에게 합격 받은 작품. 명작. 걸작.
→ 철저한 등급제를 거쳤기 때문에 quality control이 가능하였다. 프랑스의 와인처럼. 장인의 rule을 갖고 있었다. 제주도의 한라봉도 처음에 나왔을 때 얼마나 맛이 있었습니까? 지금은 신 것인지, 맛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실추된 이미지는 어떻게 회복하는가?
장인정신을 기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사회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장인. 그리스의 신 머큐리(Mercury) 에르메스(Hermès)
뒤러의 <자화상> 13세. 22세. 26세. 르네상스의 도제 시스템.
입고출신(入古出新)
추사체의 본질과 비밀. 추사체는 "괴기, 기괴한 글씨"이다. 유최진《초산잡지》_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완당의 장인적 수련과 연찬(硏鑽): 팔뚝 아래에 309 비법이 있다. 70평생 벼루 10개를 구멍을 내고, 붓 천개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
초의선사. 추사의 작품 茗禪(명선). 비슷하면서 다른... 고전을 섭렵하였다.
MBC <놀러와>에 출연할 것이라 이전의 편들을 보는데, 들국화 전인권이 자신의 창법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창법의 비결은 따로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집에 있는 2,000편의 음반이었다." → 입고출신: 고전으로 돌아가 새 길을 열다.
박규수, <추사체변천론(秋史體變遷論)>
_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명나라 동기창 글씨에 뜻을 두었고, 24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청나라 옹방강을 쫓으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이후 추사는 송나라 소동파, 당나라 구양순으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 (......) 그 후로는 대가들의 장점을 고루 체득하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어지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나는 후세의 소년들이 추사체를 함부로 본뜨지 말라고 한 것이다.
→ "장인적 수양정신을 익혀라."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
정약용의 제자에게 써준 "보정산방(寶丁山房)" 글. 산이 낮아서 작게 써준 山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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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chowood/7149556
대원군에게 난초를 가르쳐주었던 추사 김정희. 용산에서 과천으로 압수이동(押水以東, 압록강 이남= 한수이남) 할 때,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 칭찬으로 시작하는 글은 애정을 갖고서 비판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9,999의 마지막 1 웬만한 인력, 인력밖에서 오는 것도 아닌 것이다 (어쩌라는 것인지...) 장인정신을 강조.
K-pop 과 관련하여서...
강남스타일과 관련해서 노력하여서 성과물을 얻은 싸이도 대단하지만, 싸이를 알아본 저스틴 비버의 매니저 스쿠터 브라운의 대단한 안목을 칭찬하고 싶다. 갈고 닦은 실력에 겸손 태도. 국제성을 갖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
서양 사람들이 쓴 《서양미술사》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냥 《History of Art》라고 쓰기 때문에, 자기들의 것만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저들의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의 것도 알고 있다. 모두를 아는 것이 한국의 강점이다.
지금까지는 벤치마킹을 해서 한국적으로 변형, 재창조를 하였다. 동아시아의 한류가 일어나는 것도 세계적 공통성(보편성) 속에 우리 고유의 것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 미국의 음악보다 K-pop을 더 친숙하게 여기며 받아 들인다.
생각이 조금 열려있던 버트런드 러셀은 중국에 다녀온 뒤 자신의 책의 이름을 《철학사》에서 《서양철학사》로 바꾸었다. 이것이 러셀의 위대한 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Fast Follower 의 위치였다. 우리가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 때문에 제대로 존경하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은 중국에 이어서 G2 의 지위에 있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현재 고작 G20 의 지위이다.
Fast Follower 의 위치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중국 다음의 위치를 갖고 있었으며,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우리를 볼 때, 한국문화는 당당한 우리 지분율을 갖고 있는 국가이다. 중국 다음으로 청자와 백자를 만든 나라이다. 청자를 만들 줄 아는 유이(唯二)한 국가이다. 우리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의 의미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평가할 때,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대륙으로 번져가는 것에 대해서 독일, 프랑스의 지분이 있는 것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송나라를 모방했다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 문화를 모방하여 우리만의 것으로 소화해낸 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중국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소수민족 중에서 한국, 베트남 만이 모국을 갖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우리 조상에 대한 존경의 시선이 필요하다. 국제사회의 질서 속에서 현재 우리 문화의 위치를 판단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도 그 시대의 국제질서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강릉 단오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지정에 중국이 항의를 했었다.
한반도는 쌀 농사와 보리 농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쌀 농사의 남방한계선과 보리농사의 북방한계선이 절묘하게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쌀도 보리도 농사가 어렵다.
보리 농사 끝에 단오제, 쌀 농사 끝에 추석, 한 해를 시작하면서 지내는 대보름. 이 3가지가 동제복합문화이다. 강릉단오제의 논란과 관련하여서 유니스코에서 토론을 할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문화권의 동질성에 대한 이해와 문화의 고유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서양도 이스라엘만 기독교의 명절을 지켜야하는 것 아닌가? 세계 수준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라고 의견을 필역하였고, 강릉단오제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위가 갖고 있는 행복이 있다. Fast Follower 가 갖고 있는 행복은 1위만 잘 따라가면 된다. 그렇지만 1위는 선택을 해야 한다. 1위와 2위는 차이가 얼마만큼 나는지 알 수 없다. 1등의 가치는 'priceless' 즉, 값을 매길 수 없고, 부르는 게 값이 된다.
그러나 ★★★★ 만약, 1위가 곤두박질 친다면, (현재의 1위를 뛰어넘는 1위의 등장으로 곤두박질 친다면) 미끄러진 1위가 2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4위가 되고, 5위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휴대폰 1위였던 노키아의 예에서 보듯이 1위에게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인문학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스티브 잡스의 영향도 있지만...)
그러면 '그냥 2위만 하면 되지 않느냐?' 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현재는 '1등 독식주의', '승자 독식주의'이다. 1위가 모든 것을 혼자 먹는다.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 참여정부의 탓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타이밍의 원인도 한 몫을 했다. 요즘의 복지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데, 문화복지가 첫번째로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오늘 말한 것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내부에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것을 알아가며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장인정신의 질을 판단하는 것의 기준이 되는 돈의 문제도 잘 판단해야 한다. 강연하는 강사에 대한 처우도...(웃음)
이 밤에 이곳에 모이신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다음 번에는 MBC <놀러와>에서 만나겠습니다.
▶▶▶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분명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쉽지 않은 내용들을 이렇게 쉽게 맛깔나게 풀어서 설명해주시는 오래된 내공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에서 언급된 부분과 《유홍준의 국보순례》에서 읽었던 부분들에 대한 정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는 읽지 못했는데, 반드시 읽고 우리의 것에 대해서 알도록 노력해야 겠다. 모르고 있으면 그냥 '멋지다', '신기하다'로 밖에 평가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 스토리로 다가오기 때문에 잘 기억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사인을 받으면서 '입고출신'을 써달라고 부탁드리고, "월간중앙"의 연재에 대해서 여쭈었다. 일간지와 월간지 연재가 계속되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으신 듯한 인상이었다. 답사기는 언제나 기다려지는 이야기이다. 읽으면 마치 그곳을 직접 갔다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것, 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면 이런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이야기 해주는 멋진 책이다. 아직도 생생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서문을 읽을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이미지와 함께 보기 위해서 <조선일보> 유홍준의 국보순례 칼럼,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 검색, 네이버의 그림 검색 등을 링크를 해두었음을 밝힙니다. (혹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수정하겠습니다.)
보정산방 이미지 출처는 아래 블로그의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