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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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스 크로싱>(존 윌리엄스 저, 정세윤 역, 구픽) 다 읽었다. 만약 언젠가 통신이 두절된 곳에 고립되어 갇히게 된다면, 그곳에서 읽고 싶은 책들의 후보군에 이 소설을 끼워넣고 싶다.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에 가둘 수 있는 어느 한 시절의 스케일이 이토록 심원하고 광대하다니!


한 문장, 한 문장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처럼 생생하게 육박해 오는 가운데 혹독한 자연 속에서 환상의 들소 떼를 좇는 사냥대의 여정을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어느샌가 굴곡진 삶 속에서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는 우리네 인생을 자연스레 몽타주하게 된다.


뭐든지 가질 수 있는 광활한 서부, 가능성의 태양이 이글이글 빛나는 서부. 그러나 그곳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만큼 깊고 어둡다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남는 것은 성공이라는 신기루가 아닌 치열하게 각축하는 인간의 갈망과 욕망 뿐이라는 것을 굉장히 굵은 획으로 그려낸다.


문장 단위로는 굉장히 섬세한 세필이지만, 멀리서 서사 전체를 바라보면 엄청나게 굵은 붓질로 그려낸 시원하고 호쾌한 움직임이 돋보인다고나 할까. 최근에 영화에 빠져 있는데, 이것이 영화가 아닌 문학만이 펼쳐낼 수 있는 묘사의 힘이요 맛이구나 하는 감탄은 덤이다.


사실 서부극이라고는 존 포드의 영화 몇 편 말고는 아는 바가 없어서 읽기 전에 좀 걱정했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훌쩍 여행을 떠나듯, 혹은 고립된 곳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먹듯 두고두고 읽고 싶은 소설이었음.


그리고 존 포드가 이 소설 영화화해줬으면 좋겠다... 그는 서부극의 황제지만 동시에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감독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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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판 사나이 로버트 A. 하인라인 중단편 전집 1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고호관 외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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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다. 별은 멀고 인생는 짧으며 도박장은 항상 수수료를 떼어간다. 하지만 인류는 아주 낮은 확률을 뚫고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하인라인은 인류에게 돈을 건다.“ 

- 데이먼 나이트


'3대 SF 거장' 이라는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중단편 전집 전권을 손에 넣고도, 한동안 책장을 들춰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관학교 출신 공학자' 라는 작가의 이력, SF알못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아득해보이는 '하드SF'라는 소갯말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책 본문에 앞서 수록된 소설가 데이먼 나이트의 멋드러진 추천사가 나를 매혹했다.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의 시대를 통과한 공학자가 이 불확실한 우주에서 '인류에게 돈을 건다'니! 이 작가도 인류애를 말하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읽어왔던 것과는 조금 낯선 방식일테지만. 그렇게 호기심에 등떠밀려 <달을 판 사나이> 첫 권을 펼쳤다.


어디가서 문송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지만, 의외로 책장은 술술 넘어갔다. 인간의 남은 수명을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단편 <생명선>부터 그랬다. 만약 이런 기술이 발명된다면 어떤 업계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까? 공학적 원리와 문학적 비유가 어우러진 기술적 묘사를 지나 주인공에게 닥친 위기를 차근차근 좇아가다 보면, 하인라인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작가가 기술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타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플롯을 뼈대로 삼아, 당대 사회에 가상의 기술이라는 변인을 집어넣은 하인라인의 사고실험은 2023년 시점에서도 놀랍도록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아, 1939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것 자체가 반전일 수 있겠다.


<빛이 있으라>의 '빛'이 실제 빛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제목 짓는 센스부터 취향이었다. 하인라인답게, 빛의 발광에 대해 이런저런 기술적 정보들을 쏟아내지만 문송한 사람은 대충 넘겨도 지장은 없다. 왜냐면 이 작품은 '본격 이공계열 로맨틱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참 아름답군요. 설명도 정확하고요."

"얘기에 집중 좀 해라, 이 덩치 큰 고릴라야. 피곤한 건 알겠지만 엄마 말 좀 들으라고."


공학자 커플이 티격태격하며 인류에게 영원한 빛을 가져다줄 신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애정도 높아져 간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당신도 외치게 될 것이다. 하인라인, 이 로맨틱한 마초 영감탱이...


<도로는 굴러가야 한다>와 <폭발은 일어난다>의 공통점은 아무리 첨단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결국 기술을 다루는 사람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는 점일 것이다. 하인라인은 기술적으로 완전하더라도, 그 기술을 통제하는 인간 개인에게는 투철한 윤리의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인류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인간들에게 애정을 쏟는다. 세계의 디테일을 구성하는 기술적 상상력과 빼어난 장면 연출력이 정신없이 극에 몰입하게 한다. 여기에 특유의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유머가 읽는 맛을 더한다.


'그렇게 붐비는 대도시에서 안전하게 운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보행자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재빠른 자 그리고 죽은 자. 보행자란 주차 공간을 찾아낸 사람으로 정의될 수도 있었다.'

- <도로는 굴러가야 한다> 중에서.


<달을 판 사나이>에 이르러 하인라인의 사고실험 속 인류는 마침내 생활 거점을 '달'까지 넓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우주 비행사도, 과학자도 아닌 '달 정복'을 광적으로 꿈꾸는 '미친 사업가'라는 것이다. 화성을 정복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출현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참고로 <달을 판 사나이>는 1950년에 발표되었다.) 


'해리먼은 한숨을 쉬었다. ‘뭔가에 꽂히는 것’은 어떤 미국인 남성도 단숨에 기소하고, 재판에 회부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고,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 형언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행위였다.'

- <달을 판 사나이> 중에서


그러나 우리의 하인라인은 좀 더 낭만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달을 정복하겠다'는 목표에 불타는 주인공 해리먼은 '달을 밟고 싶다'는 원초적인 호기심과 열정을 품고 있다. <허생전> 같은 느낌인가? 라면서 해리먼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신없이 돈을 끌어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최후까지 지켜보다 보면, 결말에는 잔잔하게 낙조처럼 우리 가슴 속에 자리잡는 흥분과 감동이 있다. 그래, 이게 낭만이지! 라고 외치게 된달까?


하드SF, 마초적인 작품 세계... 하인라인의 작품세계를 수식하는 여러 표현들이 있을 테지만, 1권을 읽은 시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대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소년의 심장으로 첨단의 인류를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고. 정신없이 고개를 처박고 책장을 넘기게 되는 모험과 유머가 담긴 소년 소설이라고나 할까. 2권 역시 기대가 된다. 얼른 읽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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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오다 :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 정보라·이경희·박애진·남세오·전혜진·구슬·박해울
정보라 외 지음 / 구픽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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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애정이 듬뿍 묻은 오마주. 흥미로운 재해석에 원작까지도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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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밥 딜런 - 사랑과 저항의 노래 가사 읽기
손광수 지음 / 한걸음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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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지순례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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