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올 2월 마지막 날 휴일이자 막바지 한 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덕수궁 돌담을 따라 생긴 긴 행렬 가운데 어머니와 나도 있었다. 활동적이시며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빈센트 반 고흐 전을 보기 위해 서울시립미술관에 간 것이었는데 하필 서울시민들이 다 몰려든 그 날,  덕분에  3시간을 밖에서 보낸 끝에야 겨우 들어간 미술관 안에는 그림을 보려고 줄을 선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고흐의 삶이 비극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네덜란드의 목사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가 죽은 형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빈센트로 불려졌다는 것,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빈센트의 생일이자 자신의 첫 아이가 죽은 날을 사택 근처의 교회공동묘지로 어린 빈센트를 데리고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갔던 일화를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유독 비싼 값에 팔리는 고흐의 그림들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별나게 고통스러웠던 화가의 삶만큼 그의 유작들이 별나게 대접을 받는다고 너그럽게 이해하게 된 것은 큰 변화였다.

그만큼 캔버스와 물감으로 표현한 유화들, 혹은 목탄화, 연필뎃생 등이 섬세한 언어적 필치로 다시 보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해서, 그들이 살고 간 인생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백석

이토록 짧은 시 한 수를 읽는 동안 읽을 때마다 가슴이 울리며 눈이 저려옮을 느끼는 것은 웬일일까! 구구절절 가슴을 찌르고 또 눈앞을 침침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진리 앞에 그 간 막혔던 숨구멍, 귓구멍, 목구멍이 한꺼번에 열린 듯 한 당혹감과 처절함이 아파오는 목구멍과 함께 뒹군다.

독설가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의 삶 역시 생명력 있는 무희의 춤과 달리 자신은 완전히 시력을 잃고 암흑 속에서 외롭게 오랫동안 살다 갔다. 시력을 잃은 화가라니! 참으로 하늘이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아닌가! 인생을 알면 알수록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생을 살다가는 인간에 대해 깊은 애통함이 솟아 오른다. 

모두 스물일곱 명의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이 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얼마 전에 읽었던 고흐와 테오 간의 서신을 묶어 책으로 낸 것처럼 화가의 인생과 함께 놓치고 간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리라 짐작을 했다.하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좁은 범주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4장에 걸쳐 각각 7인의 화가들을 분류했다.
목차란의 작은 제목들도 한결같이 시(詩)였다.


                그림 속에 스며있는 사랑의 빛




                     고통을 이겨내 맑은 분노




                           슬픔을 건너온 풍경




               세상을 향해 터뜨린 꿈의 꽃망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이 계절에 어울릴 법한 낭만과 아름다움을 향한 관심에 이끌려 책을 선택했건만 아뿔싸! 저자인 정지인시인은 너무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회분석가였다.


첫 장에 소개 된 김남주 시인과 김호석 화가의 이야기는 70-80 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육신이 만신창이가 될 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 맑고 영롱한 정신만큼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곧은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시집의 제목-솔직히 말하자와 그 표지그림에 잘 나타나있다. 김남주 시인의 초상을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나로서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생각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고귀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화가가 중심이 된 책이란 것은 선입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모두가 치열하게 살다 간 역사의 산물을 모은 책이다.

권력자의 강압에 의해 검은 테이프로 입이 막히고 손발엔 굵은 포승줄로 묶여도 누구는 붓을 들어 시를 쓰고 누구는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남겨 놓았다. 후세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누구와 어떻게 싸우다가 갔는지를 왜곡된 역사와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끝까지 신념을 지키며 목숨을 버린 그들이 있었다. 왜 몰랐을까? 그림은 곧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답고 창의적인 것이라고만 배워서 였을까! 어린 시절 형이 그린 그림을 고스란히 베껴서 교내 그림그리기대회에서 상을 타 왔을 때의 그 아련한 부끄러움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처럼 너무나 무지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구도, 그리고 무엇보다 보고 있으면 눈이 멈추고 심장이 고정되는 감동을 주는 명화들에 대한 기대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바뀌었다. '무엇을 겪었던 것일까?,무엇을 전해주고 싶었을까?,무엇을 남겨주려 이토록 오해와 편견이 판을 치는 세상에 대고 끝까지 주린 배를 잡고 너무나 가난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못 한 벌 사 주지 못한 채 이별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까지도 그리고 또 그렸던 것일까?'

노인이 된 모습으로 자신의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서 있는 모네와 허연 수염과 지팡이를 쥔 손이지만 눈 빛 만큼은 강렬하고 힘 찬 젊은이의 것인 르누아르와 마음 넓이가 대서양만큼은 됨 직한 일리야 레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은 저기까지 어떻게 버티며 갔을까?'가 자연스럽게 묻고 싶어진다. 사람관계에서 가장 추하고 풀지 못할 매듭이 자꾸만 더해가는 삶이 부담스럽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공부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허탈감이 안개처럼 무겁게 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오직 탐욕과 속임수와 분쟁을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제 멋대로 행하다가 뉘우침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태반일터, 하필 내가 왜 이런 가망 없는 인간을 붙잡고 내 인생을 갉아먹으면서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줘야 하는가!

끝도 없는 질문과 불만으로 터질 것 같은 머리가 렘브란트에 이르러서 구멍이 나 버린 것 같다. 젊은 시절의 풍요롭고 전도양양했던 천재의 몰락과 함께 쏟아지는 배신과 멸시, 그리고 온 갓 비웃음을  피할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몸으로 다 받을 수밖에 없었던 렘브란트, 그는 비로소 인간의 야만스럽고 탐욕스럽고 파괴적인 얼굴의 실체를 보게 되고 사람들은 그의 곁을 모두 떠나버렸지만 그는 깊어지고 더 단단해졌다. 그 강함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분노, 노여움에 대해서도 좌시하지 않고 싸워 이겨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근엄하고 강인한 남성스러움 대신 푸근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렘브란트를 천재라고 하는 이유를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면서 확인했다. 이 그림이 이 책 가운데 있는 그림 중 가장 내 마음 속 깊이, 내 영혼을 울리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명을 다 한 노(老)예언자는 혼자서 어느 동굴 깊숙한 곳에 힘없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한 팔에 기대어 있지만 그의 정수리엔 가장 빛나는 지혜의 빛이 쏟아져들어온다. 그 얼굴, 예루살렘의 패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해야했을 그 괴로운 사명을 다 마친 선지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눈물 같다.

이 세상에는 왜 이토록 어려운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일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하셔도 될 일을 어린아이로 출발해서 노인으로 저무는, 필경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유약한 인간에게 맡기신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언제까지 해야 할 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백석의 시(詩)처럼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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