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 리.전황당인보기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33 한국소설문학대계 33
전광용 외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전광용의 '꺼삐딴 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이인국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대기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읽어내리기가 쉬웠다. 이인국 박사같은 사람을 우리는 '기회주의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회주의자'라는 말에는 으레 비난의 목소리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 민첩하고 약삭빠른 사람, 기회를 잘 잡아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을 잘 하는 사람, 변하는 시류에 자신을 개조시켜 잘 따라 흘러가는 사람, 줏대없이 시대 변화에 따라 권력층에 빌붙는 사람, 이런 사람을 분명 기회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순발력과 상황·시대 판단력, 민첩성, 개조 노력을 바로 자기 개인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지니고 있다. 이것은 분명 '나쁜 행동'이라고 무조건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인국 박사는 왜 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 떠올리게 되고, 비난을 받는 것일까.

그는 실력있는 의사였다.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의술 능력과 자기 개조 능력, 처세술을 발휘하며 시대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상위층에 위치할 수 있었다. 일본 세력이 우리나라를 점령하자 그는 친일파가 되어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춘식'이라는 사상범이 입원하려 했을 때도, 그는 '의사'라면 생명을 더 중시여겼어야 하는데도 그의 입원을 거절한다. 바로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질까봐 그런 것이다. 그 후 소련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칠 때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감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잘 잡아 위기 상황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아들을 러시아로 유학을 보낸다. 한편, 남쪽에 내려왔을 때는 또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딸은 영문학을 전공하게 하고, 자신은 영어 공부를 하며 또다시 상위권으로 안정적으로 위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놀라운 처세술과 노력으로 그가 원하는 출세, 상위층에 도달하는 것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난 사람'이었지, '된 사람'은 아니었다. 지도층에 있다고 생각되는 이인국 박사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기회를, 개인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이용만 했던 것이다. 그는 좁은 세계를 볼 줄만 알았지, 사회의 이면과 인간적인 면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에게 으레 기대되는 기초적 윤리, 도덕성과 절개가 결여되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은 자신이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시대에 도태되는 낙오자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무론 그의 입장에서의 의견에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는 과연 떳떳한 인물인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지난 번에 신문을 보다가 기업에 관련된 기사를 본 것이 생각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벌이라고 꼽히는 가문들 중 대다수가 일제 때의 친일행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들의 재산을 정부에 환원해야 한다는 견해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견해도 있었다. 그 대의 부의 축적으로 그 자제들은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유학 경험과 수행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이미 그들이 사회 지도층, 상류층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와 교육정도는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기득권자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보수적이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자세를 보여왔다. 이인국 박사는 자신의 재산과 위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사회화하고, 새롭게 대두된 권력에 순응하는 기회주의적인 방법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안타깝게 작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높게 평가하는 인물들은 무조건 부를 많이 축적하고, 공부만 많이 한 '난 사람'뿐이 아니다. 바로 '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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