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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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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엘리 출판사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나와있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새로운 깨달음과 앎을 위해 낯설고 불편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 문장에 나는 곧장 지식탐구독서단에 신청서를 넣었다. 언젠가부터 계속 해서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자주 여기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나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잘' 살고 싶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잘'의 의미는 화려하고 부유한 것이 아닌 꾸준히 옳은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에 당연히 더 가까웠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잠시 멈추게 된 건, 지금 마음 속에 과연 분명한 중심을 잡고서 나의 태도를 믿고 있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사실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쉽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꼭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한편으로는 편안하기까지 하다. 이유를 대며 외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대한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들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또한,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데어라 혼의 책,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부터 누군가 머리를 세게 한 대 친 것 마냥 얼떨떨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고,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일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이길보라 작가님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었던 이유도 비슷한, 아니 사실은 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는 사회 속 다양한 약자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또한 그 속에 포함된 한 사람으로서 분명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자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고민의 출발 지점이 혹시나 나의 기만에서 나오는 태도일까봐, 내가 누군가를 너무 쉽게 동정하고 연민하고 있었을까봐.

 여전히 혼란스러운 내게 이 책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미디어에서 숱하게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있는 만큼 이 책은 내게 큰 어려움을 겪게 하지 않을 거라 생각 했다.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대했는지는 사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작가는 내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놓기만 했다.

현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어디까지 용납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이 책에서 작가는 결국 우리 사회는 죽은 약자를 이용해 살아있는 약자의 존재마저 지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야비하고 정교한 작업들이 결국 살아있는 약자의 입을 끝까지 틀어막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작가는 보통의 미디어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죽은 유대인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는지, 그런 방식이 오히려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를 보편화 시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을 끝까지 집요하게 해내고 만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나의 애도가 결국은 약자들을 위로하는 가장 쉽고, 아무 쓸모 없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약자들의 '고달픈 죽음'을 숭배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는 살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참 아이러니한 일처럼 느껴졌다. 애도는 결코 나쁜 행동이 아니지만 그것이 뒤틀릴 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고민해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을 중반쯤 읽었을 때, 잊고 있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떠오르면서 집중하기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다. 이 책의 방향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기는 하지만 아예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그런 내 생각이 결국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해서, 고통을 말하는 쪽이 완전 무결하지 않아서, 라는 편협적인 생각에서 시작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아차 싶었다. 한 번도 이야기 되어본 적 없던 죽은 유대인에 대한 뒤틀린 시각이 이제야 이야기 되고 있는데 나는 또 거기에 무슨 조건을 달려고 하는 건가 싶어 순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 점을 유념하니, 다시금 작가의 목소리를 충실히 따라갈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낯설고, 불편했다. 특히나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던 내게, 누군가 웃기지 말라며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만난 것에 안심했다.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서, 어쩌면 영영 모를 수도 있던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또다시 내 안에 이런 무거운 고민을 들이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다고.

 요즘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버린, 너무 먼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후회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약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결국 그 애도의 목적이 살아있는 약자들에 대해, 또는 살아있던 약자들의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으로써의 목적으로 바뀌었다면 그건 우리가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아닐까 짚어본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있고, 살아간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는 일, 그리고 나또한 누군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일. 나는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누군가 우리의 곁을 떠나기 전에, 또다시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 두고 멀리서 그들을 애도하며 잊어버리지 말고 지금도 곁에 있는 수많은 우리들을 생각해보자고.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끝까지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부디 오래오래 서로를 환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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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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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그동안 내가 나도 모르게(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정곡을 찔린 기분. ‘살아가는 모습‘보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용기내어 이야기 하는 유일한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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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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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서평단을 신청할 때 망설임 없이 써냈던 사유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타인이 가진 고통을 함부로 동정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가 기만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 그 혼란스러움을 알아차리기 위해 신청한다고.


무언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마음에 걸리던 문제였다. 나는 사회적 약자의 현실에 대해 '알아차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공감하며 '동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물을 것이며 누구에게 들을 것인가.


그런 와중에 나는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다. 엄마와 카페에 있던 때였다. 그날도 엄마와 우리가 잘 사는 건 아니어도 그래도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해보자 하는 이야기를 했던 날이었다.

엄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내가 그래도 비교적(비교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적 약자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아니, 뿌듯이라니. 그런 감정이 들때면 나는 곧바로 내 자신이 위선적이라고 느꼈다.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위선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딜레마였던 거다.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든 와중에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 된다는 소식을 읽었으니, 나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엄마를 다시 앉히기까지 하고서 서평단 신청을 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느낄 때 당신은 가장 무지한 상태일 수 있다.'


서평단이 되고 나서 책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뒷표지에 적힌 글을 읽어내리면서 마음이 쿡쿡 찔렸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공감과 생각이 납작한 감정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니 부끄러웠다. 그건 틀림 없이 부끄러운 감정이었다.


이 책을 쓴 이길보라 작가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코다'이다.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오가며 양극단의 세계를 살아온 사람.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그런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약자들의 세계를 보고 이해 하고, 그것을 '나같은' 독자에게 착실히 연결해 준다. 책의 초반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세계와 이 책에 나오는 세계를 구분지어 읽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현실이 내 삶까지도 확장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 어려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내려갔다. 내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멀쩡하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착각이었다. 나는 이제 막 서른살이 된 여성이고, 지금 이 사회에서 여성은 분명한 약자다.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그렇게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오로지 내 몸뚱이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뚜렷한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 했던 거다. 구분지어 생각 하고 있었던 거다. 그 납작하고도 가벼운 생각이 부끄러웠다, 정말로.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타인의 경험과 감각을 상상하며 말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나의 위치가 아닌 너의 위치에서 듣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다르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83p


나는 이 문장이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생각 한다. 비로소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집중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당신의 위치에 섰을 때 내게 무엇이 보이고 들리는지 알아차려야 한다고 작가는 너무도 담담하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누군가를 대상화하여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울 거라고 믿는 건 또 하나의 선입견이 아닐까요? 착한 장애인만 존재해야 한다는 그런 통념 말이에요.'

-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중 넷플릭스 다큐 '데프 U' 인용 부분33p


넷플릭스 시리즈 '데프 U'에 나오는 장면을 이야기 하며 그러면서 생겨날 수 있는 완전히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짚어준다. 은연 중에 '나'와 '약자' 사이에 계급을 만드는 이들. 장애인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 눈을 흘기고, 선을 넘는다 생각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닌가? 하고 비장애인이 멋대로 그들의 세상에 선을 그어버린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비장애인들이 가장 자주 저지르는 잘못인 '타자화'인 것이다.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것. 무지는 분명한 죄다. 나또한 그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는걸까. 농인을 말 못 하는 장애인이 아닌 '목소리가 다른 사람'으로 호칭하는 사회를 상상해 본다.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41p


이러한 태도가 분명하게 필요한 시대다. 정상, 비정상이 아닌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다름을 어떻게 각자의 삶에 연결 시키고 확장 시킬지에 대한 사유가 절실하다. 이것은 소수가 해야 하는 고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사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과 미움, 질투와 억울함 등을 지우고 부정하기 보다는 함께 머무르며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중 하미나 작가의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똑똑하고 오만한 여자들' 인용 부분 72p


결국 나의 삶은 서로 다른 각자의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각장애인에서부터, 코다, 미등록 이주아동, 재일교포, 영 케어러, 그리고 여성까지 다양한 존재를 탁월하게 연결 지은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한 순간도 이들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을 기다렸으면서도 첫 페이지를 펴기가 어려웠다. 내가 저지른 무지에 대해 알아차리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느꼈던 착각, 더이상 그 착각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 책을 펼쳤다.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자격을 부여 받은 것도 아니며, 내가 해왔던 모든 무지를 완전히 깼다는 자만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제야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 당신이 아니라 나만 보고 갇혀 있던 세상을 알아차린다. 그러면서 감히, 여기서부터라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잊지 말고 알아차리자고.


아마도 이 책을 읽겠다 마음 먹은 독자들 역시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과도 다름 없으리라 생각해본다. 앞으로도 이길보라 작가의 시선을 믿고 싶고, 궁금해 하고 싶다.


'코다를 불쌍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중언어 사용자이자 두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이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잘 포용할 수 있을까 혹은 잘 쓸 수 있을까에 대해서 함께 한국 사회가 고민했으면 좋겠다.'


작년 3월, 어느 라디오에 출연했던 작가의 인터뷰를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앞으로도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꾸준히 알아차리겠다는 마음과 함께, 개인으로서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심스레 고민해 보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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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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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오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독이 나를 덮친 것처럼 피로해 눈을 감았다. 작품의 에필로그가 539페이지에서 끝났던 상당한 분량의 책, 그러나 피로의 이유가 단순히 호흡이 긴 장편 소설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디에간을 따라 엘리만을 찾으러 다닌 일이, 거기서 만나는 모든 인물의 삶의 호흡을 쫓아가는 일이 내게는 아주 긴 여행을 끝마친 것처럼 피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운했다. 이 책의 뒷표지에 나와있는 '글쓰기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의 고통과 환희'라는 문구보다 줄거리를 잘 설명해줄 자신은 사실 없다. 해서,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이 책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줄이고 그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했던 어지러운 생각들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늘어놓으려 한다.


작가라는 호칭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걸까. 그러니까 작가의 '자격'이란 대체 무엇일까. 글쓰기를 좋아하던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 막연하고 먼 질문을 종종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쓰고, 글을 쓰며 내내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지만 내가 작가라고 생각한 적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없다. 내 이름으로 된 단독 출판물도, 등단의 경험도 없는 나는 그냥 어떤 변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일반인A에 가깝다. 나는 대체 작가란 무엇일까 싶으면서도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의 이야기를 잘 이야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목소리도 빌릴 줄 알게 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건─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거야. 엘리만이 그랬어. 소외의 슬픔이지.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496p>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며 얽히는 작가들의 나이, 성별, 출생지, 그리고 역사…그런 것들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것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등장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시가 D.는 작가의 작품이 아닌 개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 했지만 나는 작가들이 써낸 모든 글들이 결국은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체화된 어떤 결과물이라 믿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왔던, 또는 살고 있는 시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숨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비록 엘리만은 자신을 작품 그 자체가 아닌 출신이나 피부색, 그리고 사적인 영역으로만 판단하려는 시선에 괴로워 했지만. 사실 이는 변함 없이 자신들의 보편적인 잣대로 작품을 판단하려는 서구 문단의 문제이지, 작가가 어떤 시대를 지나온 사람인지, 그 작가가 어디에 발을 딛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은 딱히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판단'이 문제다. 나는 그저 작가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에서 끝난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썼고, 그래서 이것은 의미 있고 어쩌구 저쩌구…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게 작품의 평가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작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딱 하나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왜 썼을까 하는 궁금증. 거기에는 작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 뿐이다. 엘리만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딱 한 명의 사람이라도.

사회적 고통이라는 문제 앞에서 글쓰기의 문제가 어떤 무게를 지니겠는가? 절대적인 존엄성의 갈망 앞에서 절대적인 책을 찾는 일이, 정치 앞에서 문학이, 파티마 앞에서 엘리만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그래서 나는 아이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휴가를 보내려고, 가족을 만나려고 왔다고 했다.

<인간들의 은밀한 기억, 412p>

이 이야기의 중심은 결국 우리 삶에서 문학이 가지는 의미다.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최근에 지인과 이야기 하면서 내가 이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일어나는 어떤 참혹한 일들, 이를테면 사회적 문제라든지 비참한 인간사들…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글을 쓰겠다고, 쓰고 싶다고 이야기 하는 일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저 모든 문제들 앞에 도대체 내가 글을 쓰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냐고. 나는 르포르타주 문학을 잘 써낼 자신도 없고, 그런 글을 매끄럽게 쓸 재주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아니 쓰고 싶은 글은 결국 한 개인의 이야기인데 이런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준히 썼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그런 것 뿐이었다. 개인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어쩌면 나를 닮은 타인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는. 그러면서 또 꾸준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썼고.

문학이 무엇이다 라고 단정 짓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이 책을 읽고서 어쨌든 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단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문학에는 그의 삶의 한 부분, 또는 삶이 통째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통조림 같은 것이고 그것을 열어보든 열어보지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그것은 영원히 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저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그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거기에 있을테니까. 그거면 됐다고, 나는 그렇게 나를, 내 글을 위로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리를 이어준 것은 문학이 삶의 자기목적성을 구현한다는, 우리가 공유한 필사적인 믿음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학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문학은 우리가 세상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인간들의 은밀한 기억, 56p - 57p>

엘리만의 흔적을 찾아가는 디에간을 보면서 나는 인물들 개개인의 삶에 매료 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냥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 했는데…<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은 부끄러웠다. '증명'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문학은 무엇을 끊임없이 증명할 수밖에 없는 선 위에 놓여있는 모양이다. 그것만이 작품을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요소라고 이야기 해도 될까.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이 책에 대해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문학에 대해서도 바로 이거야! 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다만 자꾸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멈추지 않고 작동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어쩌면 문학 속에는 아무것도 찾을 게 없을지 모른다. 문학은 시커멓게 반짝이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관과 같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526p>

책의 중요성은 우리 앞날에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되리라는 확신에서 오기보다는, 그것을 만나기 전부터,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 책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었다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끌어당겼다는 직관에서 온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500p>

이제 나는 어떤 의미가 되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기 위해 글을 써보려 한다. 내가 겨우 생각해낸 결론은 이것이다. 처음 책에 실린 내 단편 소설을 읽은 주변인들이 글은 좋지만 너무 솔직하지 말라고 했다. 적당히 너를 가려서 쓰면 안되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잘못 쓴 글'을 세상에 내놓은 것만 같아서. 그러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이 책을 통해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조심스레 확신을 가져본다. 앞서 말했듯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을 먼 독자를 위해 글을 쓰겠다. 그거면 앞으로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무모한 생각이 든다.

올해가 가기 전 이 책을 만난 일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임솔아 작가의 추천사를 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서평단을 신청 했다. '소설에 빠져들수록 세계는 엄청나게 또렷해진다. 지독하리만큼 현실을 일깨운다.' 하는 문장에 대체 어떤 책이길래 하는 심정으로다가. 덕분에 나는 실로 오랜만에 문학을, 나를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었다.

문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늘 흔들고 마는 딜레마. 쓰기와 쓰지 않기.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539p>

앞으로도 오래 문학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여전히 문학과 작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수백번도 생각이 바뀌고 고민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 책을 꺼내들 것 같다. 해답서의 역할이 아닌, 캄캄한 길 위, 잠시 시야를 밝혀주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내가 그어놓은 밑줄들이 이 책속에서 영원히 깜박거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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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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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본으로 받은 애나 번스의 '노 번스', 정식 출간 전에 받은 책이라 결말 없이 중간에서 끊겼지만 사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중반부부터 읽기가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이 들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책이 어렵거나, 이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어떤 인물과 맞닥뜨릴 때마다 겪는 구토감 때문이었다. 영국군이 쏜 검은색 고무탄 서른일곱개를 가장 소중하고 재미있는 보물이라 생각하며 모으던 어린 어밀리아는 계속 되는 내부의 폭력, 외부의 폭력적인 세계로 인해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음식의 섭취를 중단하고 신체를 포기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렇게 어밀리아의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동안 동시에 어밀리아가 발을 디디고 있는 내부와 외부의 세상 역시 조용히 차근차근 끔찍하게 변해간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은 폭력과 전쟁이 일상이 된 사회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이자 여성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왜 망가져야만 하는지를 섬뜩하면서 노골적이지만 어딘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어밀리아라고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책에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 되어 무너지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어밀리아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는 조금 더 내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여성이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지, 왜 그것을 포기하게 되는지 후반부에 드러나면서 나는 절망하고 쓰라렸다.


 어린 소녀에서 열 일곱이 된 어밀리아는 거식증에 걸려 있고, 그것은 마치 어릴 때부터 일상적인 폭력과, 분쟁의 폭력에 노출 되어 있는 어밀리아가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말처럼 느껴진다. 폭력에 의해 가장 먼저 망가지는 수많은 몸들과 정신을 지켜보면서 어밀리아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그 세계 안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 몸을 포기하는 것. 몸을 그만두는 것.


 전쟁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으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건 성적 폭력이다. 거식증에 걸린 어밀리아는 폭력적인 친오빠 믹과, 그의 아내 미나가 역겨울 정도로 폭력적인 섹스를 하는 것을 질리도록 목격하고, 두 사람은 거식증에 걸린 어밀리아를 깔아뭉개고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 하고...그것은 어밀리아에게 있어 강간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타인이 제 몸을 침범하는 일,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포기한 어밀리아에게 그보다 더한 끔찍한 일은 없었으리라.


 문장마다 빈틈 없이 들어 차 있는 폭력과 혐오를 목격하면서 읽는 내내 힘겨웠으나 고작(고작이라는 말보다 어울리는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런 이유로 읽기를 중단할 수는 없는 책이었다. 누가 멈춰주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는 책이었고, 덕분에 나는 정식 출간이 되기 전의 부분까지 무사히 읽어볼 수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책이 끝이 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내가 어느 날에, 그러니까 어밀리아의 이야기와 여러 다른 몸의 이야기가 남아있을 '노 본스'를 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예감할 수 있다.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은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보다 어제보다 오늘 더 과격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쉬워지고, 거기에 무감각해지는 인간들과 망가지는 인간들이 한데 뒤섞이는 풍경에 익숙해 진다. 슬프게도 나는 요즘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곳에서도 그러한 풍경을 자주 보고, 자주 절망한다. 물론 나는 총을 맞은 적도 없고, 폭파된 건물을 지나가본 적도 없으며,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과 생이별을 한 적도 없지만 나 역시 어떤 불분명한 폭력의 세계 한가운데 서 있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노 본스'를 읽으면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무너지기 시작할 때는 얼마나 확실히, 철저히 무너지는지를 보게 됐고, 그래서 단순히 절망하기 보다는 이 한복판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엇도 포기 하지 않으려면.


 읽는 내내 인상이 찌푸려졌고, 어떤 부분에서는 읽기 힘들어 잠시 책을 덮을 때도 있었으며, 이 책을 읽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막연히 두렵기도 했었지만 결국 나는 몇 줄의 글을 써낸다. 어밀리아의 망가진 몸에서 나를 보고, 수많은 여성을 보고, 우리를 본다.

나는 어밀리아가 온전한 몸을 끝내 포기 하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다음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고, 끝을 내야 한다. 비록 가장 먼저 망가질 수는 있어도 결코 끝까지 망가지지 않게. 


 나는 어밀리아가,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 무엇도 포기 하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한다. 하나의 비극은 결코 하나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애나 번스의 '노 본스'가 그 사실을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어서 두렵다. 그러므로 읽는다. 숨을 가다듬고, 또다른 폭력의 시대, 그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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