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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엘리 출판사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나와있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새로운 깨달음과 앎을 위해 낯설고 불편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 문장에 나는 곧장 지식탐구독서단에 신청서를 넣었다. 언젠가부터 계속 해서 이런 태도를 견지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자주 여기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나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잘' 살고 싶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잘'의 의미는 화려하고 부유한 것이 아닌 꾸준히 옳은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에 당연히 더 가까웠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잠시 멈추게 된 건, 지금 마음 속에 과연 분명한 중심을 잡고서 나의 태도를 믿고 있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사실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쉽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꼭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한편으로는 편안하기까지 하다. 이유를 대며 외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대한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들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또한,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데어라 혼의 책,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부터 누군가 머리를 세게 한 대 친 것 마냥 얼떨떨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고,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일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이길보라 작가님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었던 이유도 비슷한, 아니 사실은 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는 사회 속 다양한 약자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또한 그 속에 포함된 한 사람으로서 분명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자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고민의 출발 지점이 혹시나 나의 기만에서 나오는 태도일까봐, 내가 누군가를 너무 쉽게 동정하고 연민하고 있었을까봐.
여전히 혼란스러운 내게 이 책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미디어에서 숱하게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있는 만큼 이 책은 내게 큰 어려움을 겪게 하지 않을 거라 생각 했다.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대했는지는 사실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작가는 내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놓기만 했다.
현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어디까지 용납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이 책에서 작가는 결국 우리 사회는 죽은 약자를 이용해 살아있는 약자의 존재마저 지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야비하고 정교한 작업들이 결국 살아있는 약자의 입을 끝까지 틀어막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작가는 보통의 미디어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죽은 유대인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는지, 그런 방식이 오히려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를 보편화 시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을 끝까지 집요하게 해내고 만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나의 애도가 결국은 약자들을 위로하는 가장 쉽고, 아무 쓸모 없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약자들의 '고달픈 죽음'을 숭배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는 살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참 아이러니한 일처럼 느껴졌다. 애도는 결코 나쁜 행동이 아니지만 그것이 뒤틀릴 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고민해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을 중반쯤 읽었을 때, 잊고 있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떠오르면서 집중하기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다. 이 책의 방향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기는 하지만 아예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그런 내 생각이 결국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해서, 고통을 말하는 쪽이 완전 무결하지 않아서, 라는 편협적인 생각에서 시작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아차 싶었다. 한 번도 이야기 되어본 적 없던 죽은 유대인에 대한 뒤틀린 시각이 이제야 이야기 되고 있는데 나는 또 거기에 무슨 조건을 달려고 하는 건가 싶어 순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 점을 유념하니, 다시금 작가의 목소리를 충실히 따라갈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낯설고, 불편했다. 특히나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던 내게, 누군가 웃기지 말라며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만난 것에 안심했다.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서, 어쩌면 영영 모를 수도 있던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또다시 내 안에 이런 무거운 고민을 들이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다고.
요즘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가버린, 너무 먼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후회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약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결국 그 애도의 목적이 살아있는 약자들에 대해, 또는 살아있던 약자들의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으로써의 목적으로 바뀌었다면 그건 우리가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아닐까 짚어본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있고, 살아간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는 일, 그리고 나또한 누군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일. 나는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누군가 우리의 곁을 떠나기 전에, 또다시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 두고 멀리서 그들을 애도하며 잊어버리지 말고 지금도 곁에 있는 수많은 우리들을 생각해보자고.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끝까지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부디 오래오래 서로를 환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