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지음 / 마음의숲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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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산책을 다녀온 것 같다. 상쾌하기도 하고 무언가 가벼워진 기분이다. 소설을 주로 읽는 내게, 친한 언니가 (가끔은 에세이도 읽어보라며) 권해준 책인데, 덕분에 한 숨 잘 쉰 것 같다. ⠀⠀⠀⠀⠀⠀⠀⠀⠀⠀⠀⠀⠀⠀⠀⠀ ⠀⠀⠀⠀⠀⠀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얹혀있는 무언가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즉각적인 해결이 가능한 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진 않을 거다. 단지 교실 어딘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게 창문으로 차갑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온 것만 같다. 바람으로 답답한 마음을 환기시키고 그로 인해 좀 더 깨어있는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 ⠀⠀⠀⠀⠀⠀
책을 읽으면서 나와는 비슷한 저자의 경험에 놀라기도 했고, 많은 부분에 공감하기도 했다. 몇몇 나와는 다른 의견에 있어선 노트에 내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했는데, 마치 친한 친구와 카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모든 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지만, 냉철한 조언에 뜨끔하기도 했고 따스한 응원에 위로받기도 했다. ⠀⠀⠀⠀⠀⠀⠀⠀⠀⠀⠀⠀⠀⠀⠀⠀⠀ ⠀⠀⠀⠀⠀⠀⠀⠀⠀⠀⠀⠀
내가 소설을 주로 읽는 이유는 문장이 좋아서, 스토리가 좋아서, 또 다른 세상에 흠뻑 빠지는 느낌이 좋아서인데, ⠀⠀⠀⠀⠀⠀⠀⠀⠀⠀⠀⠀⠀⠀⠀⠀⠀⠀⠀ ⠀⠀⠀⠀⠀⠀⠀⠀⠀⠀⠀⠀⠀⠀⠀⠀ ⠀⠀⠀⠀⠀⠀⠀⠀⠀⠀⠀⠀
가끔은 이런 에세이가 주는 환기도 괜찮은 것 같다. ⠀⠀⠀⠀⠀⠀⠀⠀⠀⠀⠀⠀⠀⠀ ⠀⠀⠀⠀⠀⠀⠀⠀⠀⠀⠀
현실이 너무 답답하거나, 아로나민골드로도 풀 수 없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있거나, 쿠쿠다스처럼 부서지기 쉬운 마음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누군가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157~158p.
자신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시선과 판단.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타인에 대해선 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이자, 가장 중립적 비평가로 둔갑하여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 그러나 누군가 이차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이차방정식이 아닌 그 사람의 이해력 부족에 있듯이 누군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이해력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쩔쩔 맬 필요도 없고 우리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우리는 편협한 이들에게 이해 받으려 사는 게 아니며,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다. + 3인칭 시점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여기는 오만은 언제나 진실을 오독하기 마련이다.

168p.
관계 속에서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낱개의 개인들만 남은 것. 그 사실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

215~216p.
안전에 대한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듯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268~269p. 어떤 일이 유독 힘들다면 그건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서, 내가 엄살을 떠는 사람이라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기성화가 내 발에는 유독 아프게 느껴진다 해도, 그게 발의 잘못은 아닌 거다. (...) 때론 이해 받지 못함이 서글플지라도 적어도 자신은 스스로를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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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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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결말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며 놀라는 독자들이 있는가하면 나처럼 충분히 예상했다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주어진 결말과는 달리 내가 만약 폴이었다면, 나는 오래된 연인 로제도, 젊고 열정적인 시몽도 아닌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거나 그 누구의 사랑도 아닌 지금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거나. 하지만 그러기에 사강이 만든 폴이란 여인은 사랑에 있어서 너무나 의존적이고 맹목적이며 나약했다. ⠀⠀⠀⠀⠀⠀⠀⠀⠀⠀⠀⠀⠀⠀⠀⠀ ⠀⠀⠀⠀⠀⠀⠀⠀⠀⠀⠀⠀⠀⠀⠀⠀ ⠀⠀⠀⠀⠀⠀⠀⠀⠀⠀⠀⠀⠀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에 책임지지 못하는 로제나 젊고 열정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어린 감정을 추구하는 시몽이나 쉽게 흔들리고 상처받으면서도 잘못된 사랑을 끝내 놓지 못하는 폴이나. 여기 나오는 그 어떤 인물도 내게 온전한 이해를 받을 순 없지만, 이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 중에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런 덧없고 변하기 쉬운 사람 사이의 감정을 짧고 가볍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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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읽기 좋은, 가을에 맞는 소설이었다.

137p.
그녀로서는 그들의 관계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유보적인 태도에 신물이 났다. 다만 혼자 있을 때면 로제가 그녀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오류처럼 여겨졌고, 그들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공포에 가까운 느낌으로 자문했다. ‘그들‘이나 ‘우리‘는 언제나 로제와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시몽은 ‘그‘가 아니었던가. 로제는 이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 현재의 생활에 진력이 나면 그는 그녀에게 와서 불평을 늘어놓고 그녀를 되찾으려 하리라. 그리고 아마도 성공하리라. 시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고, 그녀 자신은 또다시 고독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게 되리라. 그녀는 자신의 숙명, 이 모든 것이 피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그 느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구누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148p.
"난 너무 불행했어." 그가 말했다.
"나도 그랬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대면서 울기 시작헀다. 자신의 이 두 마디 말을 시몽이 용서해 주기를 바라면서.
로제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고는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자, 울지 마."라고 말했다.
"잘해 보려고 했어. 정말 잘해 보려고......" 이윽고 그녀가 미안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해 주어야 할 사람은 로제가 아니라 시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 줄곧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로제는 말이 없었다.

150p.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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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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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p. <고두 - 임현>

나를 비난하고 싶겠지. 비열하고 졸렬한 인간이라고 욕하며 세상에 진실을 밝히겠다고 정의로운 척 떠들어대고 싶은 거 아니니? 그런데 다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 거거든. 들키지 않을 만한 허물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거든.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아무나 쉽게 비난하고 혐오하고 그게 정의인 줄 아는 거지. 정치인을 혐오하고 가정폭력범과 강간범을 혐오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거야. 인터넷에 올리고 퍼뜨리고 그걸로 무언가 바로잡는 줄 알아. 그러면서도 정작 그게 자기 모습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거든. (…)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고 그러므로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데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아. 그런 세계에 사는 자들의 전형이 있고 그것은 자기와 다르며 그러므로 그래서 그랬을 거라고 상상하는 거야. 여전히 어려워하는구나. 너라면 다를 줄 아는 거겠지. 그러나 네가 다른 게 아니란다. 다만 그런 상황이 너에게 없었을 뿐.

80p. <눈으로 만든 사람 - 최은미>
베란다로 나갔을 때 강윤희는 눈사람을 세워놓았던 화분 받침에 물이 넘칠 듯 말 듯 찰랑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물 위에 흑미가 빼곡히 떠 있었다.
강윤희는 왠지 그걸 보고 있기가 힘들어 다른 일들에 집중했다. 출근이 시작되면 한동안 손대지 못할 집안일들을 하루에 하나씩 해치웠다. 일주일은 금세 갔다.
주말이 되었을 때 강윤희는 베란다로 나가 다시 화분 받침 앞으로 갔다. 찰랑거리던 물은 다 증발되고 화분 받침에는 습기를 머금은 흑미들만 까맣게 모여 있었다.

107p. <문상 - 김금희>
마주보면서 송은 희극배우의 나이가 몇이더라, 생각했다. 자기보다 많게는 열 살쯤 많을 것이다. 자기도 십 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있을까, 다시 생각했다.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297p.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 천희란>
한참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 뒤에야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수중에서만 살던 식물이 육지로 올라온 것은 바다의 산소 농도가 급격히 낮아진 탓이라고요. 산소가 없어 죽어나가야 했던 식물들의 사체가 뭍으로 올라와 광합성을 하며 스스로 산소를 내뿜기 시작했다고 하셨어요. 식물은 존재의 방식을 바꿔가며 생존해왔다고도 하셨고요. 그렇지만 이전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은 식물뿐이 아니라 육지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습니다. 그걸로 비로소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라고요. 생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을, 자신의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로 홀로 존재할 수 없어서,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가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바꾸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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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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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이었지만, 읽는 내내 이곳은 너무 추웠다. 여름에 읽은 소설인데, 이렇게 겨울을 가져다 줄 수 있다니. 작가의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노찬성과 에반>,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읽으며 마음이 더 먹먹해졌다. 나는 이 작가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먹먹함이 때로는 너무 힘들면서도 때로는 더 가까이에 두고 싶어 어쩔 줄 몰라했다.

21p. <입동>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36~37p. <입동>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 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일므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弔花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173p. <풍경의 쓸모>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214p. <가리는 손>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220~221p. <가리는 손>
아이가 서두르듯 벌떡 일어나 부엌 등을 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인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 조금씩 달라 보일까. 이제 정말 소원 빌 시간이다. 아이에게 박수쳐줄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른다. 재이가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짓는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초가 꺼지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그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나는 꼼짝 않는다.

226~227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계속 보면 눈에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하늘과 테두리가 선명한 뭉게구름, 초원 위에 드문드문 솟은 풍력발전기를 보자 ‘평화로운 해양성기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섬나라 하늘이 언젠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하늘, 전쟁에 지친 병사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며 회상한 풍경과 닮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

264~265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 편지를 써요.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 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265~266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켜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 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어딘가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 아이야말로 밥은 먹었을까. 얼마나 안 먹었으면 동생이 꿈에까지 나타나 부탁했을까. 참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방울이 편지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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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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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정용준 작가의 <선릉 산책>, 장강명 작가의 <알바생 자르기>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 필용과 양희가, 공원을 걸어다니던 한두운이, 중간관리자 은영과 알바생 혜미가 오래도록 내게 남아 물음을 던질 것만 같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대답을 하려고 할까.

37~38p.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부끄러워서?"
양희가 필용에게 물었다. 여태껏 한 적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 여기 있었다. 필용과 양희는 마주보았다. 밤이라 얼굴은 거의 지워졌어도 거기에는 양희의 눈이 있었다.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125p. <선릉 산책 - 정용준>
한두운은 주정낮아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고 숨을 참는 사람처럼 그는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묻은 흙과 오물을 털어내고 어깨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안정시켰다. 그의 몸은 떨고 있었다. 묘한 떨림이었다. 몸이 떨고 있는 게 아니라 몸속 깊숙한 곳에서 엔진이 작동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뒤 나는 그것이 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두근두근 뛰는 게 아니라 고장난 기계처럼 두두두두 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물속에서 시체를 끄집어 올리는 심정으로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껴넣어 들어올리려 했다. 한두운은 두 손으로 나를 밀치며 스스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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