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에 머문 날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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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가림이 심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제발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 대부분이 우리에겐 낯선 사람들이고, 그들이 쓴 작품 또한 접한 적이 없으니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제발트가 이들의 작품을 하나씩 친절하게 소개해 줬더라면 우리가 접근하기에 좀 더 쉬웠을지 모르지만, 여기 있는 제발트의 글들은 이들의 작품을 차례대로 소개해 주기보다는 그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파편적으로 서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비록 <전원에 머문 날들>이 제목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처럼 읽기 편한 책은 아니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이 표현이 무엇보다 책의 내용을 잘 담고 있는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다시 한 번 더 연달아 읽었고, 밑줄 친 문장들을 타이핑하면서 그 부분만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파에 올리면서 반복적으로 또 읽어보았는데, 처음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알아보기 쉽게 느껴져 재독하는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낯선 글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여기 나온 작품들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언젠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보려 한다. 그럼 지금과는 또 다른 깊이와 방향으로 제발트의 말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헤벨의 산문에서 문장 끝에 카덴차와 음조의 변화를 주어 더없이 웅숭깊은 감정의 순간들을 드러내는 이런 기법을 통해 언어는 내면을 향해 전환되고, 우리는 우리의 팔에 닿는 이야기꾼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 헤벨은 그의 반음조 내린, 헛헛한 맛을 내며 끝나는 덧붙인 문장들 속에서 생의 연관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와 저기 드높은 망루에 오른다. 그곳은 장 파울Jean Paul이 남긴 유고 속한 메모에 따르면 인간들의 머나먼 축복의 땅을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곳으로, 또다른 격언에 따르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그 고향이다. - P27

나는 하지만 루소의 방에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 이따금씩 호수를 스치며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커다란 포플러나무 잎사귀들이 사부작거릴 뿐, 미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짙어지는 어스름 속으로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고운 자갈이 깔린 길은 점점 더 환해졌다. 나는 울타리가 쳐진 목초지와 은빛의 고요한 귀리밭, 포도밭과 막사를 지나 그새 칠흑같이 컴컴해진 너도밤나무 숲의 끝자락까지 올랐다. 산비탈에 서자 호숫가 저쪽에서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이 호수 자체에서 부상하는 것 같았다. - P56

루소가 이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쓰고 있는 것처럼 "숲속 그늘 속에서는 내가 잊히고, 자유롭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모든 적이 다 사라진 것처럼." - P60

발레산은 산 밑까지 내려온 텁텁한 대기의 베일이 벗겨진 풍경으로 묘사되는데, 그 풍경은 어떤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녀서 그곳에 있으면 모든 것을, 자기 자신까지도, 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까지도 금세 잊게 되는 곳으로 그려진다. 루소의 글에 나타나는 투명성이라는 주제를 파고든 장 스타로뱅스키는 "완벽히 맑은 풍경의 순간이란 개인적 실존이 스스로의 한계지점에서 해소되고 대기 속으로 꿈꾸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라고 쓴다.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스스로를 남김없이 투명하게 만들기는 현대적 자서전 문학의 창시자가 품은 최고의 야심이었다. 수정水晶은 이러한 야망의 상징으로, 스타로뱅스키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이 순수한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딱딱하게 굳은 영혼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 P72

행복과 향락을 약속하는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단념해버리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또한 노동이 있고, 궁핍과 빈곤이 있으며, 어둠이 있다. 켈러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유령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 P116

"나는 숲을 뚫고 지나 경작지와 목장을 걸었고, 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윤곽이나 어렴풋한 빛이 보이는 마을을 지나갔다. 자정 무렵이 되어 꽤나 널찍한 마을 공유지를 지날 때는 깊은 정적이 대지를 감쌌다. 서서히 움직이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은 보이지 않는 철새 떼가 공중에서 날갯소리와 함께 울며 날아갔기 때문에 더욱 활기를 띠었다."
켈러의 산문이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게 무조건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특히나 영원의 테두리를 더듬어 나아갈 때야말로 자신의 가장 기막힌 정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바로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한 문장, 한 문장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의 산문의 아름다운 궤도를 따라 움직여본 사람은 그 산문이 어느 방향으로나 얼마나 그윽한 심연으로 떨어지는지, 또 어떻게 한낮의 햇살이 저 멀리 바깥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가려 흐릿해지다가 죽음의 암시와 더불어 사라지게 되는지 번번이 전율 속에서 느끼게 된다. - P128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 아무리 박사 학위 논문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해도 어떤 체계적인 분석으로도 포착하기 어렵다는 마르틴 발저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정말로 옳은 지적이다. 그토록 그늘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펼치는 페이지마다 더없이 다정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순수한 절망에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쓰지만 절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며, 미세한 부분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지상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만 공중에서 주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런 작가, 읽는 도중에 벌써 해체되기 시작해 몇 시간 뒤에는 글 속의 하루살이 같은 인물과 사건, 사물 들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산문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153

"네 바지 좀 봐. 밑이 다 너덜너덜해졌잖아. 물론 나도 알아. 바지는 바지일 뿐이지. 하지만 바지는 영혼과 똑같은 상태에 있어야 하는 거야. 다 해진 누더기 바지를 입는 건 그 사람이 얼마나 게으른지 증명해주니까. 그 게으름은 영혼에서 오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누더기 영혼을 가진 거야." 이와 같은 비난은 발저의 누나 리자가 발저에게 이따금 가했던 질책에서 따온 것이리라. 하지만 마지막의 천재적인 표현, 즉 누더기 영혼에 대한 부분은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의식하고 있는 서술자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발저는 처음부터 그의 삶에 드리워져 있었던 그림자로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기만 할 거라는 예감이 일찌감치 들었던 그 그림자로부터 글쓰기를 통해서,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벗어날 수 있으리라 희망했으리라. 그의 이상은 중력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 P162

"그토록 다감하고 또 탁월하게 느끼는 한 인간이 동시에 그토록 감정이 빈곤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동화 속에서처럼 인생에서도 순전히 가난과 공포 탓에 감정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리라. (...) 발저가 일종의 철두철미한 동화와 공감을 통해서 그 안에 영혼을 불어넣는 방식은 어쩌면, 가장 하찮은 것들에서 입증되는 감정이야말로 결국 가장 처절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 여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은, 사소하다는 듯한 어투로 재와 바늘, 연필, 성냥개비를 논하는 이 대목이 실은 작가 자신의 순교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기원한다. 이 네 가지 사물들은 임의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고문도구 내지는 자신의 분신을 위해 필요한 도구들, 그리고 그 불이 꺼지면 남는 사물인 것이다. - P170

"내 등은 굽었다"라고, 동명의 산문에서 작가는 보고한다. "머리에서 종이까지 먼 길을 가는 단 한 개의 단어를 따라가느라 몇 시간 내내 몸을 굽히고 앉아 있으니까." 이 작업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지만 불행하게 하지도 않는다고 그는 덧붙인다. - P172

내가 처음으로 읽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은 클라이스트가 스위스 툰Thun에서 잠시 살았던 시절에 대한 것으로, 자기 자신과 글쓰기에 대해서 절망하는 한 인간의 고통을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주변 풍경과 함께 다루는 글이다. "클라이스트는 어느 교회 안뜰의 담장에 앉아 있다. 사위가 온통 습하고 후텁지근하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윗옷 단추를 푼다. 저 아래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에 의해 아래로 던져진 것 같은 노랗고 붉게 타오르는 호수가 있다. 생명을 얻은 알프스산은 경이로운 몸짓으로 이마를 물속에 담그고 있다." 그후 나는 몇 쪽 되지 않는 이 이야기에 거듭해서 빠져들었고, 이 작품을 시작으로 발저의 나머지 작품들을 답사하는 짧고 긴 여정들을 떠나곤 했다. - P185

중요한 것은 맹렬한 노동의 동물인 우리와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의 자율적인 현존이다. 그런데 그 사물들은 (보통은)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므로,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아는 바보다 그것들이 우리에 관해 아는 바가 더 많다. 그 사물들은 우리와 함께한 경험을 지니고 다니며―사실상―우리 자신의 역사가 쓰인 우리 앞에 펼쳐진 책 그 자체이다. - P198

인생은, 운명이 사람을 말 대신 잡고 두는/ 밤과 낮이 격자무늬를 이루는 체스판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여 잡고, 죽이고/ 하나씩 하나씩 상자로 돌려보낸다.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들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는 전적으로 프루스트의 규정을 따라 덧없는 순간들과 성좌들이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남으로써 중지되는, 지나가고 있고 지나갔으며 잃어버린 시간의 주제와 연결된다. 빨간 장갑 한 짝, 다 타버린 성냥개비, 도마 위의 작은 양파 한 개와 같은 사물들은 자신 안에 모든 시간을 품고 있으며 화가의 헌신적인 노고를 통해 영원히 구원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물들을 감싸고 있는 기억의 아우라는 사물들에 멜랑콜리의 결정을 이루는 일종의 추모Andenken의 성격을 부여한다. - P208

놓쳐버린 시간과 기억의 고통, 죽음의 형상이 자기 자신의 삶에서 가지고 온 인용으로서 여기 추모함 속에 모아져 있다. 추모란 인용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던가. 텍스트에 (또는 이미지에) 집어넣은 인용은 움베르토 에코가 썼듯이 다른 텍스트와 이미지 들에 대한 우리의 앎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을 점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금 시간을 요청한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들임으로써 이야기된 시간과 문화적 시간 속으로 진입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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