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끓는 꿈의 바다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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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단] 창비에서 나온 신간 『들끓는 꿈의 바다』의 서평단에 뽑혀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호주 산불과 관련된 책이라고 들었고, 그 시기 뉴스를 점령한 호주의 산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호주 출신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이 책을 꼭 읽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주례사 비평은 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들었던 생각에 대해서 평소와 같이 몇 줄 적어 보고자 한다. (우선, 스포일러가 존재하지 않는 서평을 간단히 하고, 그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감상을 나열하고자 한다. )

이 책은 어렵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문학의 대중화가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현대문학은 창의성이라는 굴레에 잡혀있다는 생각도 든다. 『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가 “현대 작가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험하게 써야 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 또한 모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쉽게 책을 후루룩 읽기에는 흐름을 파악하기란 쉽지않다. 중간중간에 비유와 단서를 숨겨놓고, 심지어는 황당무계한 소재까지 넣어놔 독자를 당황시킨다. 내가 지금 판타지나 풍자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착각에 들어갈 때면 다시 중심 서사로 돌아오게 만든다. 즉, 중심 서사의 호흡도 빠를 뿐더러 주변 서사까지 빠르게 진행된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과 기후위기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호주의 아웃백, 오지의 바짝 마른 열기가 소설에서도 전달되는 듯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호바트(테즈메이니아 섬)과 시드니지만, 소설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는 뜨겁게 들끓고 있다. 마치 호주 산불처럼 말이다. 독자는 열기로 인한 아지랑이 속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꼭 읽어 보길 권한다. 그러면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화재 끝에 다시 자랄 숲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삶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점이 되는 서사는 역시 프랜시다. 프랜시가 어떤 삶을 살았냐고 물어 본다면, 누구든지 그 시대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애나는 그 삶은 결국 속박의 삶이었다고 말한다. 보부아르가 여성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애나 자신은 터조를 자신의 유리천장으로 삼고 그를 넘어서기만을 바라며 자랐다. 이는 모순적이게도 자유를 위한 속박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프랜시도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연명치료로 그녀를 다시금 속박시켰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삶일 것인가? 프랜시가 죽고 9개월 된 프랜시의 증손녀가 등장한다. 이는 마치 리사 샨이 말한 마시나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나의 끝난 삶은 새로운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사라져 버린 몸’

애나의 신체 일부가 점점 없어질 , 그리고 남들이 그것에 대해 큰일로 생각하지 못할 , 나는 마치 고골의 『코』를 읽는 같았다. 그리고 전공 시간에 들은 환유와 대유가 떠올랐다. 그녀가 신체 부위를 하나씩 잃을 때마다 화재로, 기후변화로 지구상에 있는 생명이 하나씩 없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하나 제대로 인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지를 했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고골이 『코』에서 없어진 코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페테르부르크의 관등제에 대한 풍자로 사용했다면, 작가는 애나의 신체를 기후위기로 목숨을 잃고 있는 멸종위기 동물들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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