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닮은 사람
정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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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한참 재미있게 본 적이 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의 강렬하고 소설적인 긴장감이 나른하게 떨어지면서 한국의 전형적 드라마로 변해가서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끝까지 봤던 드라마였기에 도서관에서 발견한 원작소설을 찾아 읽었다.

『너를 닮은 사람』은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을 재출간한 책으로 모두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가장 먼저 표제작이자 드라마 원작인 <너를 닮은 사람>을 읽었는데, 드라마와 같으면서도 다른 서사가 흥미로웠다. 볼거리가 있도록 살을 붙여가는 드라마와 다르게 원작소설은 군살없이 깔끔했다. 자신이 거짓으로 쌓아올린 행복을 지키기 위해 너라고 부르고 있는 클라인을 불행하게 만들었으면서도 끝끝내 용서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클라인을 나쁘다고 여기는 주인공의 의식, 그리고 그로 인한 모호한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드라마보다 좋다. 소설적이기 때문인걸까.


모호하다는 말이 있었던 마지막 장면을 처음에는 독자에게 맡기는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니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주인공의 자기연민과 자기변호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늑하게 조성된 전원주택 단지의 취약점은 작은 소리에도 비밀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표현한 문장이 주인공의 심리와 맞물려서 좋았다.

너는 내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집 안에 없는 사람처럼, 네가 찾은 집이 내 집이 아닌 것처럼 응답하지 않았다. 너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서 기척이 없자 점점 더 세게 두드렸다. 사방이 산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전원주택 단지는 조금만 떠들어도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너를 닮은 사람/ 정소현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거의 어떤 잘못을 감추기 위해 핑계를 대거나 정처없이 떠돈다. 잘못은 늘 의도하고 계획적이지 않고 어쩌다가 실수로 인한 결과물이다, 라고 그들은 스스로 책임을 면하려 한다. 누군가 책임을 묻기 전에 현장을 떠나서 숨거나 감춘다. 그러나 인물들에게 모두 너의 잘못이라고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부모로부터 '실수로 태어났다'는 낙인을 받은 이들로 유기 폭력 방임 등의 학대를 받아왔으며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절대자에게 늘 죄를 진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할수록 절대자들은 강하게 부정하며 밀어냈다.

모성이나 부성은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소설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한 부모와 닮지 않은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정당하기 때문에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정주하는 인간이 되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삶을 살아간다.

<너를 닮은 사람>을 읽으러 왔다가 다른 소설들을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실수하는 인간>과 <지나간 미래>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다.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존재하고 그 미래에서 지나온 자신의 발자국을 뒤로 밟아가는 인물들의 행적이 소름돋도록 잘 맞아떨어진다.

죽일 생각은 없었고 그저 겁을 주려던 것인데 큰 실수를 해버렸다. 석원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며 살았는지 기억해보려 했지만 무엇이 실수였고 무엇이 고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한 것은 태어난 것이 실수라는 것이다.

실수하는 인간/ 정소현

내가 보았던 미래는 내가 직접 부산으로 찾아가는 것인데 남편이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조금 의아했다. 미래라는 게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그대로인 건지, 변하기도 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나간 미래/ 정소현

두 소설 모두 실제 현실과 인물이 생각하는 현실의 어긋남에서 오는 장면이 교차되며 혼란과 긴장감을 준다. 실제와 환각을 넘나드는 이미지와 인물의 자아 분열같은 요소들이 있어서 드라마나 단막극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양장 제본소 전기> <돌아오다> <폐쇄되는 도시>도 기묘한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모성과 부성이 부재하고 폭력과 방임과 가난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결핍된 어른이 되어 학대받았던 시간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어느 시절의 어두운 골목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눈을 깜빡이지 않아 눈물이 흘러내려도 떠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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