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시골집에도 [보리]라 불리는 진돗개가 있다.

그 보리는 암컷이다.

책을 읽고 개에 대한 되새김을 해야할지 사람 세상의 상념을 써야할지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그저 머뭇거리는 생각뿐이다.

몽당연필에 비해 자판으로 글쓰기는 절제가 없어서일게다.

연필을 깎듯 희뿌옇던 생각 한 자락을 쳐내고, 글매를 세우고, 가슴에 돋은 칼로 글씨를 파내려가듯 원고지 한칸 한칸을 채울 엄두가 나지 않음에도 [악돌이]에게 달려들듯 글과 씨름하고 있다.

 

얼마전 어머니 환갑 생신이라 시골집에 다녀 왔다.

시골집 마당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개장(내가 보기엔 개집이 아니라 개장이다)에 진돗개 여섯마리가 짖어대며 나를 맞는다.

예전에는 그 수가 열하나였는데 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에 시골집에 들어서면서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개 짖는 소리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하나가 짖으면 나머지 녀석들도 따라 짖는 통에 잠 자기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진돗개에 대한 집착을 원망한다.

 

그 원망의 대강은 이렇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서로 으르렁대고 남 잘되는 것을 시샘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지겨운데, 자기는 묶이고 갖혀 있는데 지 눈 앞에서 마당을 뛰다니는 다른 개를 향해 쉴새없이 짖어대는 개판을 꼭 봐야만 하는지, 진돗개가 좋으면 그냥 한두마리만 두었으면 하는 푸념이다.

내 생각이지만 마당의 개들도 강아지 적에는 심성이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지금은 모두 악다구니만 남은 것 같다.

물론 아버지는 나와는 생각이 다르겠지만...

 

보리가 나름대로 삼년 서당개 풍월 이상의 식견을 보여준 길바닥의 느낌을 시골집 마당의 개들에게도 허용하고 싶다.

마당 구석에 출처 모를 개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개에게 날리던 발길질을 이제 거두고 싶기도 하다.

[벚꽃잎 날리던 학교 운동장에서 내가 다가가서 입술을 핥아먹었을 때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달아나던 흰순이의 까만 똥구멍]을 핥아대는 녀석에게 작대기를 후려쳤던 손매에 때늦은 후회도 든다.

 

책을 읽는 내내 세상과의 소통이 사람이나 개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시골집 마당의 개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나의 생각은 어찌 그리 다를까...

나를 보면 죽어라 짖어대는 녀석들이 아버지를 보면 낑낑거리며 애원을 한다.

서로 다른 것에 모두가 얽히고 ˜霞薦獵?세상이지만, 보리의 발바닥 굳은살에 묻은 흔적과 기억들을 간직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며 삶매무새를 고쳐본다.

 

시골집 마당에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악돌이같은 녀석이 있었다.

아버지가 진도까지 내려가 몰래 가져온, 진도를 떠나 실려오는 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오자마자 앉은 채 꾸벅꾸벅 졸던 강아지였는데, 십년을 넘게 그 마당에서 살았다.

어느날 진이(흰순이처럼 죽었다)라 불리는 개가 낳은 새끼를 물어 죽였기에 그야말로 개패듯 때리고 그렇게 맞은 뒤부터 그 녀석은 내가 쓰다듬기만 해도 오줌을 질질 쌌다.

늑대 갈기처럼 목덜미가 참 멋있던, 동네를 지배했던 녀석인데 내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들어가]라는 말한마디에 고개를 떨구고 개장에 스스로 갇혀야 했던 놈이다.(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들어가]라고 말하자 개장을 향해 가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을 때 녀석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아버지도 뭔가 낌새를 느끼셨는지 녀석을 다른 곳에 보냈다.

 

녀석이 간 곳이 그리고 가야 할 곳이 어딘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마을에서 악돌이가 여전히 힘세고 사납게 살아 있기를 바랐다.

 

악돌이같은 녀석의 이름이 끝내는 생각나지 않아 동생에게 전화로 물어볼까하다 그만 두기로 했다.

이름에 대한 집착이 녀석에 대한 염려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보리든 흰순이든 악돌이든 세상을 향해 맘껏 짖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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