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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은 평생 시선의 굴레에 시달린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피사체에게는 시선의 힘을 가진 주체의 욕망이 실린다. 그 욕망은 소유 혹은 파괴에의 충동으로 치닫는다. 전자는 감탄으로 후자는 멸시로 발현되지만 - 둘은 혐오의 양면이다. - 두 가지의 상반된 시선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주 혼재되어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구애를 쏟아내던 이들은 곧 본인이 소유할 수 없는 육체를 훼손하고자 하고, 혐오스런 시선을 쏟아내던 이들은 곧 기이한 육체에 발기하며 뒤틀린 판타지를 품는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2016)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속 여성들은 모두를 부정하며 욕망이 탈색된 존재로, 모종의 의도된 추락으로 시선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수백 년간 자행된 마녀사냥의 역사, 그 굴욕의 화형식을 감내한 여성들은 이제 먼저 자신의 성체聖體(혹은 속체俗體)에 불을 지른다.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탐미와 추앙, 혐오의 시선을 초월한 무욕의 신체는, 오직 순수한 자해의 열망으로만 빚어져 있다. 신념을 위한 극단적 순교. 하지만 의도적으로 추동된 불편함은 주변의 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또다른 근본주의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불타는 여성들의 궐기를 ‘미완의 전복’으로 남긴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이었을지, 그 한줌의 존엄과 연대, 불평등과 체제의 부조리함을 고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