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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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 위해선 더 가차 없이 나의 ‘옮음’의 근거를 확보하고 상대의 ‘틀림’을 논박하는 논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적 태도란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의 태도가 아니다. 서로의 의견 차를 ‘다름’이라는 말로 쉽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서로 옳고 그름을 합의할 최소한의 근거를 아예 잃어버린다. 이것은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관점이다.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교조적이다. 우리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오히려 격렬한 논의 안에 뛰어들어 수많은 목소리와 경쟁해야 한다. 그 불편한 과정을 회피한 채 서둘러 절충안을 찾고 합의하려는 것, 그것이 강요된 화해다. 그리고 이러한 강요된 화해는 매우 높은 확률로 사회적 통념의 편에 선다. …
… 해당 게시물에 댓글로 이퀄리즘이 소환된 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스스로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선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로 몰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페미니즘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퀄리즘이다. 그리고 이퀄리즘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역사가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날조한 문서에 불과하다는 사실처럼, 페미니즘을 부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든 것들은 다 엉터리다.
… 민주주의는 다양한 입장의 당사자들이 정치적 공론장 안에서 동등한 수준의 의사소통적 자원을 갖고 다퉈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식적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 변화를 원하지 않는 기득권에겐 논쟁의 장이 필요 없다. 논쟁의 장이 필요한 건 언제나 당연하게 착취당하거나 배제당하는 이들이다. 논쟁의 장을 축소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동이다.'

어떤 사안에 두 가지의 상반된 이견이 존재한다면, 하나는 의심을 불허하는 ‘사실’로 수용될 것이고 나머지는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하는 ‘의견’으로 취급될 것이다. 전자는 우아한 언어와 차분한 자태로 행해지는 기득권의 차지다. 그리고 후자는 진흙을 뒤집어쓴 채 고성을 지르는 소수자의 몫이다. 그 소음에 확성기를 달아 공론장으로 끌어들여 뜨거운 공감과 차가운 대안으로 사회의 공동선을 책정해나가는 것, 사회의 성숙함이란 그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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