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이를 두고 사회가 할 말은 없다.'
에셰크는 인간 개인의 존엄을 무너뜨릴 정도로 큰 충격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존엄한
인생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굉장히 역설적인 결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설득력 있다. 존엄사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자유죽음의 문제는 충분히 곱씹어볼만 하다.
신체 부자유의 상태,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룰 수 없도 바꿀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본인이 더 이상 살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그가 더 이상 살아가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어차피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향해 살고 있으며 이왕 죽을 것이라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원할 것이다. 사회는 자살을 죄악으로 여기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살이야말로 최후의 구원이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죽음이다.
한편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에서 아메리가 말하듯이, 자살한 사람은 사회에서 곧 잊혀진
다. "잘못은 늘 자리를 비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종교 의례를 거치고 나면 자살한 사람에 대
한 기억은 희미해져 버린다. 마치 내가 목격한 그날 이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현장이 깨끗이
치워진 것처럼. 그럼에도 자살자는 자유죽음을 택한다. 죽음은 오롯이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럼에도 자유죽음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은 자유죽음 또는 자살 이라는 께름칙한 소재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힘을 기울여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자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나로써는 책을 읽는 동안 비판의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반드시 논박해 주리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글을 쓸수록 비판보다는
다른 생각이 더 많아졌다. 저자에 대한 심한 논박은 인생의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로 일단
미루기로 했다.
자유죽음은 단순히 아메리의 주장을 수용하는 데에서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유죽음을 읽으면서 아메리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주의깊게 읽어나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이후는 아메리가 말한 것처럼 없음, 공허이다.
죽은 사람은 잊혀진다. 그리고 죽음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세계는 평안하게 흘러갈 것이다. 혹여나 한때 시끄럽더라도 한때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공허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외려 잊혀지고 싶어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자가 진심으로
죽음을 원하는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죽고 싶은가?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죽고 싶은 것이라면 진정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구름, 길가의 꽃 한 송이, 흘러가는 시냇물, 새벽녘의 하늘, 하다못해
한조각 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동한다면, 전심전력으로 죽고 싶다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또한 아메리는 우울증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 역시 자유죽음의 하나로 긍정하나,
아메리에게는 미안하게도 최근 심리학 연구들에 의하면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은 흑백논리적 사고, 과장된 상상 등 인지적 왜곡을 보인다고 한다.
인지 왜곡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이는 진정 자기의지에 따른 죽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수십년이 흘러 노년이 되고, 스스로는 거동조차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쩌면 자유죽음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사는 것이 굉장히 치욕스러운 이른바 에셰크의 상태가 될
수 있으므로. 과연?
아니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도 더욱 살고 싶을 것 같다. 안간힘을 써서 삶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삶에 대한 (나의) 열정은 이렇게나 강렬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어졌으니 그냥 사는 거지. 꼭 살면서
위대한 대의를 찾고 삶의 진실을 찾아야만 사는 건가 (혹자는 나를 보고 짐승(!)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아메리 역시 3장 <손을 내려놓다>에서 자살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삶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다. '자연이 준 생명을 거스른다는 두려움은 이처럼 크기만 하다.'
루게릭 병으로 고통받았지만 끝까지 방법을 찾고자 했으며 유머를 잃지 않았던
스티븐 호킹의 삶이 생각나는 시점이다.
역시 죽음이라는 것은 나에겐 무섭기만 하다. 평온한 죽음이라는 게 진정 존재하는가?
약물을 통한 안락사를 생각해 보자. 과연 안락하게 죽는가? 우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당사자가 고통없이 간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 그가 죽기 직전에 느낄 지도 모르는
공포와 두려움은 알 수 없다. 약물이 몸에 퍼지는 동안 진정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약물을 넣고 있는데 갑자기 살고 싶다면? 무언가 끝내지 못한 일이 생각났다면?
그렇지만 일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죽음은 무이고 끝이다. 죽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은 끝나고, 거기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는 것은 몹시도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아메리는 자유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의 그 순간, 이른바 '뛰어내리기에 앞서'는
순간은 에셰크에 저항할 수 있기에 유의미하다고 본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이에 대해서는 기꺼이 동의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살 자체를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아메리는 이 책은
자유죽음을 옹호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는 점을 단호히 말하고 있다. 책 자유죽음은 사람이 왜
자유죽음을 선택하는지 그 원인을 개인의 실존적 문제에서 찾고 있을 뿐이다.
명확히 홀로된 시점에서, 개인의 실존 여부는 자유를 갈구하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존한다.
하지만 삶이 반드시 선이 아닐 수 있듯이, 죽음이 자유에 대한 명확한 답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죽음은 새로운 길이 아니고 끝이기에 오히려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아메리가 말했듯이,
완벽한 자유는 경험될 수 없다.
이 책은 쳥년기에 있든, 노년기에 있든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자유죽음에 대한 충동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던져준다. 오랜만에 깊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책을
만났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며칠간 참 열심히도 읽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져 여러 번 지우기를
반복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어쨌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역시 죽음보다는 삶이 좋다. 책을 읽을수록, 자유죽음을 향한
갈망보다는 삶에 대한 의지가 커져갔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