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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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만년작 <폭풍우>는 셰익스피어 작품특징의 총집합

<헨리> 시리즈가 셰익스피어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1590년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을 때 <폭풍우>야말로 진정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가들의 만년작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만년작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가들의 작품연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진정한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만년작 <폭풍우>에서는 그가 작품에 끊임없이 담고자 했던 특징들이 고스란히 배여 있으면서도, 드물게도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미덕을 긍정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타난 주된 특징은 '환상'이다. 햄릿에서는 동생에게 억울하게 시해당한 햄릿의 아버지 왕이 유령으로 등장하고, 맥베드에서는 마녀들의 주술로 유령이 나타난다. 햄릿의 작품에서 유령이나 환상은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유령이나 정령이 나오는 게 판타지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사고방식에서는 환상 역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폭풍우>에서는 동생에게 억울하게 공작의 지위를 빼앗기고 영지에서 쫓겨난 밀라노 공작 프로스페로가 마법은 연마해 정령들을 불러내고 나폴리 왕 일행이 탄 배를 폭풍에 난파되게 만든다. 프로스페로의 무인도에 표류한 나폴리 왕과, 안토니오 공작 등은 프로스페로의 정령들에 의해 '시험'을 치르게 된다.  

셰익스피어 만년작에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무능력한 인간'이다. 오셀로에서 오셀로 장군은 협잡군 부하의 말에 속아 부인과 충성스런 부관을 내치고, 리어왕은 딸들의 달콤한 아첨에 넘어가 사랑스런 막내딸의 재산을 모두 두 딸에게 주어 버린다. 맥베드 역시 마녀들의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겨 죽음을 자초하게 된다. 모두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영웅들이지만 변변치 못한 아첨이나 소문, 헛된 욕망에 여지없이 자멸하는 이야기틀을 가지고 있다. 왕이나 귀족, 장군, 영웅처럼 인간의 허위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인물들이 또 있을까? <폭풍우>에서 안토니오는 형을 내쫓아 밀라노의 공작이 되지만,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나폴리 왕 알론소의 위기상황을 이용해 왕마저도 시해하려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다 보면 인간의 운명이란 가벼운 바람 앞에도 곧잘 꺼지는 촛불에 불과하다.


만년작에 이르러서야 악연의 실타래가 풀리다

<폭풍우>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들이 보인다. 2대에 이르러 죄악이 해소되는 점이다. 알론소 왕은 안토니오와 밀약을 맺고 프로스페로 공작을 쫓아낸다.

이 나폴리 왕이란 자는, 나의
천적이었으므로, 내 동생의 제안에 솔깃했어.
그는, 복종과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조공의 대가로.
즉시 나와 내 식솔들을
공작령에서 내쫓고, 내 동생한테 양도하기로 했지. 그래서,
반역의 군대가 소집되고, 어느 한밤중
단단히 결심을 한 안토니오가 열었단다.
밀라노의 문을. 그리고 칠흑 어둠 속.
임무를 맡은 자들이 서둘러 그곳에서 내쫓았지.
나와 마구 울어 대던 너를
- 프로스페로, 딸에게 (<폭풍우> 18쪽)

아버지의 죄과를 짊어진 알론소의 왕 페르난디드는 프로스페로에 의해서 깡통을 옮기는 강제 노역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죄과를 해소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를 사랑해서다.


제 가슴은 당신을 모시기 위해 날아갔죠. 거기서 살며
저를 그 일에 노예로 만들고요. 그리고 당신을위해
저는 이렇게 참을성 있는 통나무 짐꾼이 되었답니다.(페르난디드가 미란다에게, 69쪽)

아버지들이 맺은 악연이 자식에 와서 해소된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넘어선 부분이다. 페르난디드와 미란다 연인은 사랑의 힘으로 프로스페로의 시험을 통과했고 결국 아버지 알론소 왕의 죄도 용서를 받게 되었다.

내가 자네를 너무 엄하게 별 주었다면
자네가 받은 보상이 그걸 벌충해 줄 걸세. 나는
자네한테 내 삶의 3분의 1을 준 셈이니까
혹은 내 삶의 의미거나-그녀를 다시 한 번
자네 손에 건네주겠네. 자네를 성가시게 한 것은 모두 자네 사랑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야. 그리고 자네는 훌륭하게 시험을 견뎌 냈어. 이제, 하늘 앞에서
내가 인준하네. 이 값비싼 내 선물을. (프로스페로가 페르난디드에게, 88쪽)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도 2대에 걸친 인간의 운명사가 펼쳐지는데, 대체로 복수나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리어왕에서는 글로스터 백작의 맏아들 에드가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햄릿 역시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하지만 복수든 해소든 인간의 운명이 2대에 걸쳐서 일어난다는 세계관은 자체는 시사하는 바가 자못 넓다. 인간은 관계로 이어진 공동의 운명체이지만, 개인의 협잡이나 단순한 계기에 의해서 얼마든지 와해될 수 있다. 그리고 와해되기는 쉬워도 해소되기는 어려운 이 굴레는 셰익스피어가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보고도 별 감명이 없었던 사람은 아마도 개별 작품에 한정된 독서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작가를 선택해서 계보에 따라 작품을 읽는 시도는 한번쯤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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