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King Lear]

장르 : 연극 지역 : 서울
기간 : 2008년 09월 04일 ~ 2008년 09월 10일
장소 :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리어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 아침이슬 | 2008년 08월

익스피어가 왜 옛 전설인 리어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취해 비극 <리어왕>을 썼을지는 불문가지다. 자고로 늙은 권력자가 추구하는 것이라는 게 얼마나 유치하며,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또한 얼마나 얇은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구겨지기 쉬운가 하는 것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재벌의 재산을 둘러싼 어머니 다른 자식들의 야욕, 설된 사랑과 어긋난 육욕 등이 다 리어왕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리어왕은 인간의 밑바닥으로, 밑바닥으로 나아간다. 가장 많이 가진 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 사이의 빈틈 없음이라고나 할까. 어리석은 욕심이 틈 따위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리어왕>을 제대로 읽어보기란 쉽지 않다. 대본이란, 더구나 1600년대의 고어투로 적힌 대사로 된 책은 원래 대중적이지 않고, 소설로 혹은 동화로까지 각색해 놓은 <리어왕>에서 대사 하나 하나에 숨은 기지, 비꼼, 처절함, 통찰을 읽어낸다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일 수 있다. 김정환 번역의 셰익스피어 시리즈가 주목받는 이유는 제대로 된 <리어왕>에의 갈증에 있었다. 문학적 깊이를 고스란히 담고, 대사의 맛과 냄새를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번역에의 갈증. 수많은 번역자들이 돈과 시간에 쫓기고, 자신이 지닌 것 이상의 역량을 내놓느라 결국 허섭스레기를 양산하는 세태를 비관하는 이들 모두가 기다리던 그런 셰익스피어.

'그런 기대를 십분 충족시켜 줄 것'으로 믿어지는 김정환 역 표지 빨간 <리어왕>을 미처 다 못 읽은 채 미추라는 극단 이름에 마음 한 자락을 기대며 연극 <리어왕>을 관람했다. 나름대로 셰익스피어 독자로서의 열렬함의 표출이었다.

결론.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책도, 연극도 고만고만했다. 책을 무작정 펼쳐 보이는 대목 하나를 옮기면 이렇다.

이 뜨거운 눈물이, 강제로 솟아 나와,
너를 그것에 합당케 하다니. 벼락 맞을 년!
아버지가 내린 저주의 적나라한 상처들이
네 모든 감각을 쑤시리로다! 늙고 어리석은 두 눈이여.
이 명분으로 다시 운다면, 뽑아버릴 것이다, 너를,
그리고 내팽개쳐 버릴 것이다. 네가 놓쳐버린 눈물과 함께.

말하자면 역자는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한 것일 터이다. 운율을 살리며 마치 운문을 읽듯이 리듬감을 타는, 그리고 도치법의 묘미가 최고로 발휘되는 원문. 그렇게 짐작된다. 아마 의역이랍시고 원문을 훼손하는 수많은 번역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이기도 했으리라.(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실 매우 실감나고, 리어의 심중에 이는 격분, 비통함이 잘 전달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낯설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번역 투의 거슬림이 이제는 오히려 완역의 장점이 되어 버린 걸까? '너를 그것에 함당케 하다니.'... 주책맞게 눈물이 흘러 마치 배반당한 자신이 뭘 잘못해서 그런 것처럼, 혹은 배신한 딸이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되어 버렸다는 의미일 것인데, 혹 더 나은 문장은 없었을까?(대가라고 해도 좋을 번역가의 글에 토를 다는 것은 독자의 위대한 권리다.)

연극은, 열연이 매우 돋보였다. 리어나 광대의 대사가 명확히 들리지 않을 때가 더러 있었고(더구나 광야에서의 광란의 밤 장면은 <리어왕>의 핵심일텐데, 이 대목에서 대사 전달이 거의 안 됐다.) '원작에 충실함'과 '현대적 재해석'이 자연스럽게 섞이지 않는 느낌이 더러 있기도 했으며, 과도한 노출에 의아한 느낌을 한 번 가지기는 했지만, 연기자들의 역량과 열정이 봇물 터지듯 흘러 객석까지 적셨다. 거너릴, 에드거, 글로스터를 맡은 연기자들에게서는 포스가 뿜어나왔고, 다른 연기자들도 거친 숨소리로 관객의 호응을 끌어냈다. 보고 나오는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매우 냉정히 말하면 '대단한' 연극은 아니었고, 볼 만한 연극이었다. 지나친 현대적 재해석에 식상한 분들에게 매우 훌륭한 노스탤지어 충족의 기회를 줄 수 있을 만한 알맞은 기획, 가격, 품질. 솔직히 말해 뭐, 나처럼 고만고만한 관객에게는 사실 매우 훌륭했다.

어쨌든, <리어왕>, 책과 연극을 묶어 감상하면서 풍성한 문화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다.

posted by 파란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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