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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작년 여름의 초입 즈음, 창비에서 주최한 야간 인문 학교 강의를 들었다. 일천한 인문학적 소양을 보강해야겠다는 현실적 목적도 있었지만 일터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을 채우고픈 순수한 동기로 수강을 결심했다. 고작 4차례에 걸친 짧은 강의였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1번은 결석) 학부 때조차 맛보지 못한 학구열을 불태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청했다. 평소 체력적 한계 탓에 퇴근 후 가까운 친구 만나는 것조차 꺼리는 나였는데, 늦은 밤까지 이어진 강의와 뒤풀이를 마치고 귀가하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자기 단속과 소통 불가능은 단순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다뤄지는 상투적 의제가 아니었다. 내가 왜 점점 극도로 몸을 사리고 관계 맺기를 기피하는 '소통불능인'이 되어가는지 엄기호의 언어를 통해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정체 모를 우환으로 고통받던 환자에게 속시원히 병명을 밝혀준 명의와도 같았다. 비단 나만의 개별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총체적인 현상을 조명해볼 수 있었다.
담당 편집자로부터 강의 내용을 묶어 출간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드디어 한 권으로 책으로 세상 밖에 나왔다. 강의 내용은 한층 정제되고 정돈되었다. 역시 엄기호구나 하며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엄기호의 탁월함은 일상을 간파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명료한 문장력에 있다. 개별 사례들 속에서 이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짚어내고 이를 간명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힘. 그는 적어도 해외 유명 학자의 이론을 통째 가져와 '지금 여기'에 끼워 맞추는 학문적 안이함은 보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어려운 얘기도 쉽게 풀어내는 '문턱 낮은' 인문학을 설파한다. 우리 삶을 면면이 돌아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로 주조한다. 그는 '경청'과 '말걸기'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인류학자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