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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는가. 돈? 시간? 체제? 혹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은 지배당하고 있지 않은가. Time Seller(시간을 파는 남자)의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60억의 인간들 중 과연 몇이나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시간''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지 못한 인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면 도대체 왜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이미 오래 전, 인간은 체제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무기력하게 체제에 순응하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주인 된 것이 아닌 체제가 우리 시간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과도한 탐욕과 이기주의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시간을 파는 남자’라는 소설로 본인의 이러한 직관과 사상을 탁월한 상상력과 깊이 있는 철학을 바탕으로 표현했다.
시간을 파는 남자 주인공 TC는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직장에서 평범한 액수의 월급을 받고 일하며 집이 좁고 방이 없으므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며 불평하는 아내와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어릴 적부터 ‘붉은 머리 개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융자금을 낀 집이 한 채 있는 평범한 몹시 평범한 회사원이다. 어느 날, TC는 자신이 가진 것과 빚진 것을 따져 보다가 경악하게 된다. 가진 것은 너무나 별 볼일 없음에도 불구하고 빚진 융자금은 무려 35년간 일해야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5년! TC 나이 일흔다섯 살이 되어야 집의 융자금을 갚을 수 있고 일흔다섯에 TC의 평생 소원인 붉은 머리 개미를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TC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그는 밥줄이자 가족들의 희망인 회사를 그만두고 소변용기에 ‘5분’이라는 시간을 담아 팔기 시작한다. 이 상품은 TC의 예상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누구나 하루에 한 개씩은 사용하게 되는 필수품이 된다. 자신만의 시간 ‘5분’. 이 5분은 일의 능률을 오르게 하고 사랑하는 이와 더 많은 사랑을 나누게 하고 온전한 휴식을 줌으로써 심지어 어떤 회사에서는 대량으로 구매해 직원들에게 보급하기에 이를 만큼 훌륭한 상품으로 각광받는다. 이로써 TC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되고 사업을 늘리고 ‘5분’에 이어 ‘2시간’짜리 시간을 팔기에 이른다. 급기야 ‘1주일’ 패키지 상품이 나오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회사업무는 마비되고 공장은 멈추고 경제와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의 결말은 예상과는 달리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끝이 난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의 고의적인 의도일 것이다. 작가는 비극을 원하지 않았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현 체제 비판과 자신의 바람과 희망을 동시에 주고 싶어 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조리와 패해 앞에서 굴복하기 보다는 이에 맞서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기에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소설을 해학적인 희극으로 마무리 했다. 저자는 현 체제에 대한 일관된 비난과 비판보다는 자유 경제체제나 전체주의 체제를 뛰어 넘고 이들의 맹점을 보완할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좀 더 근접할 수 있는 체제 정립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저자의 말 중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 아니던가?...그러므로 새로운 기준점이 필요하다...인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게 되었다...경제적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측면들을 통합해야 한다...현 체제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때로는 우리를 과도하게 노예화하며 체제를 지탱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에게 고통을 준다...현대를 살고 있는 세계 시민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자유를 누리되, 자유에 의미를 부여하자.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되, 이를 찾는 공식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체제는 개인의 시간을 부당하게 많이 빼앗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에게 사랑과 인류애, 영성, 협력, 연대와 다른 이에 대한 도움을 표현할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 점을 잊는 체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