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 망했으면‘ 시리즈나 ‘문송합니다‘ 같은 농담이 널리 공감을 
받으며 유행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에서는 
문과형 인간은 문과 교육을, 이과형 인간은 이과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자란다. 
그래서 이공계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 중에 교재를 집필하거나 
번역을 할 만큼 글솜씨가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번역된 용어도 일본식 한자어를그대로 직역한 것이거나, 그걸 순화한다고 지나치게 순우리말로 바꾸는 바람에 도리어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 P118

박사학위 논문을 한글로 썼다. 도전이었다. 
...
시간이 남는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번역을 시도했는데, 
하마터면 졸업을 한 학기 더 늦출 뻔했다.

아무리 내가 썼던 논문이라고 해도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보다도 우리말에는 없는 용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천문학회에서 만든 『천문학 용어집』에도 없는 단어가 많았다. 각 연구자가 다루는 아주 좁은 특정 분야의 용어들을 모두 망라하려면 『천문학 용어집』은 국어사전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천문학 용어집』은 ‘범용‘이다. 
타이탄 대기 분광 연구를 했던 내게 필요한 것은 타이탄 대기 분광 용어집이었다(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 용어집』, 대한화학회의『화학 용어집』까지 수없이 들춰보며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단어는 내가 만들어야 했다. - P119

어떤 수험생이 메모지에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라고 
써서 책상에 붙여놓자 이과생이 와서 속도에는 이미 방향 
개념이 들어 있다며 ‘속력‘으로 바꿔 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남의 일이 아니다. 

아는 교사가 환경 교육 자료를 공들여 만들면서 ‘초록별 지구‘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고 했다가 
이래서 이과생은 안 된다며 의절당할 뻔했다. 
‘행성‘에 이미 별 성星자가 들어가지 않느냐는 지적에 딱히 반박할말도 없었다. 참고로 천문학에서 별은 행성, 위성, 혜성 같은 
천체를 제외하고 스스로 빛을내는 천체를 말한다. - P120

행성의 문제는 이름에 이미 ‘별‘이 들어 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행성은 크게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으로 나뉜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지구형 행성에 속하는데, 암석이 주를 
이루고 대기는 조금 있으므로 ‘암석형 행성‘이라고도 한다. 
덩치가 작고 온도가 높은 영역에 있어서 처음 형성될 때 기체를 더 많이 잡아두지 못한 행성들이다.

‘목성형 행성‘은 덩치가 더 키서 기체도 많이 가지고 있는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다. 겉은 주로 수소와 헬륨으로 된 
두터운 기체 덩어리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밀도가 높아져 액체 상태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기체를 품고 있는 목성과 토성을 가스 자이언트gas giant 라고 한다. 
천왕성과 해왕성은 ‘아이스 자이언트ice giant‘라고 한다. 
태양으로부터 너무 먼, 추운 곳에 있어서 얼어붙은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 P121

행성을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소행성대를 기준으로 태양 가까이 있는 지구형 행성들은 ‘이너 플래닛inner planet‘, 더 바깥쪽에 있는 목성형 행성들은 ‘아우터 플래닛outer planet‘이라고 한다. 
행성과학에서 대단히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우리말로 바꿔 부르기가 마땅치 않아서 영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내행성‘과 ‘외행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얼핏 생각하면 앞의 표현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지구를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다.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수성과 금성이 내행성이고, 지구 밖에 있는 것이 외행성이다.
회성은 ‘지구형 행성‘이고 ‘이너 플래닛‘이며 ‘외행성‘이다. 내행성과 외행성에 해당하는 영어 용어는
‘인피리어 플래닛inferior planet‘과 수피리어 플래닛‘superior planet‘이고, 지구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 P122

굳이 나누자면 나는 천문학자 중에서도 관측자에 속한다.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그 자료를 분석한다. 관측자는 이론가나 계산가와 팀을 이루어 일하기도 하고, 공학자와 함께 새로운 관측기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관측자인 나도 천문대에 가본 지는 오래되었다. 요즘은 주로 무인 우주탐사선이 관측한 자료를 분석하는데, 인터넷에 대부분 공개되어 있다. - P124

대학원생 때는 보현산 천문대에 종종 갔다. 수원에서부터 동대구까지 기차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영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영천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버스를 타고 천문대 아래의 ‘별빛 마을‘까지 가서 동네 산책을 좀 하다보면 천문대 직원이 차를 몰고 데리러왔다. 천문대에서 차를 보내 그날의 관측자를 
굳이 모셔가는 이유는, 천문대로 올라가는 산길이 대단히 가파르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 P125

요즘은 우주탐사선 자료를 쓰고, 직접 관측하더라도 CCTV를 
보며 원격으로 망원경에 명령을 보내기 때문에 그렇게 온몸으로 관측하는 일이 드물다. 심지어 망원경을 미국에 설치해놓았더니 시차 덕을 본다. 대낮에 내 연구실에 앉아 미국의 밤에 뜬 달을 관측하니까 밤을 지새울 필요도 없다.

그래도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면, 노을도 차분히 지고 공기가 신선한 날이면 나는 "관측하기 딱 좋은 날이네"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관측자의 일과를 상상한다.

오후 느지막이 올라가서 하늘 플랫을 찍어놓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노을을 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기계처럼
오직 관측에만 집중하는 시간. 
망원경 시야에 타깃이 들어오도록 맞추고, 초점 조절하고, 노출 
주고, 로그 적고…… 그러다 보름달이 가까이 오면, 달빛이 너무 밝아서내 타깃이 안 보인다며 불평도 하고 달이 너무 예뻐서 감탄도 하며, 의자에 푹 파묻혀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그러다 달이 지면 아침이 오기 전 까지 다시 모니터 속으로 빠져든다. - P132

어느 날 『네이처』로부터 인터뷰를 하자는 메일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 학술지 그 『네이처』였다. 
보통의 학술지에는 소정의 심사를 통과한 논문들로만 
채워지지만, 『네이처』는 학술지와 잡지를 섞은 듯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앞부분은 과학 잡지답게 취재 기사와 서평, 에세이 등이 실리고 후반부에는 최근에 심사를 통과한 학술 논문들이 실리는 
식인데, 여기에 논문이 실리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연구실 창에 현수막을 걸어도 될 정도다. - P133

남벽과 북벽, 절벽에 해가 잘 들고 덜 들고 하는 장면을 자주 
상상하다보니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를 다룬 존 크라카우어의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가 떠올랐다. 
똑같이 가파른 산이라도 해가 잘 들어서 오르기가 비교적 수월한 곳이 있고, 해가 잘 들지 않아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절벽이 있다고 했다. - P138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를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여럿 키워서 그중 한 사람이라도 대단해지는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세계적 과학자가 어디서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날 리 없는데.
- P146

그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향한 부름에 상당히 많이 응했다. 아직 탐사선 발사도 하지 않았는데 세계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한국의 달 탐사 관계자들이 열심히, 잘,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서였다. 
한국형 달 탐사에 사람들이 더욱 관심 갖고 지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파도,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다 괜찮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좀더 많은 사람이 
천문학을 선택하고 행성과학자의 길로 와주기를,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럴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자명했다. 
어쩌면 내게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열심히 응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한국형 달 탐사가 처음 시작된 바로 그때처럼.
- P148

두 대의 탐사선 보이저 1, 2호는 1977년 지구를 떠나 멀리 있는 행성들을 향해 떠났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모두 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손짓하고 있었다. 
우선 목성까지만 가면 되었다. 그 다음에는 타잔이 커다란 넝쿨 줄기를 바꿔 잡으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듯 보이저도 행성들의 ‘중력 그네‘를 타고 다음, 또 그다음 행성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목성의 중력을 받아 휙 돌아서면 토성으로 향하게 
되고, 토성의 중력을 밧줄 삼아 좌회전을 하면천왕성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천왕성의 중력그네를 타고 해왕성까지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구에서부터 준비해가야 하는 연료와 에너지원, 그리고 여행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할 수 있는 궤도, 176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는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 보이저는 질주했다.

- P150

보이저를 통해 인류는 목성의 ‘고속 연사‘ 사진을 동영상 보듯 
감상했다. 스냅숏에서 보았던 목성의 줄무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세차게 흘러가는 구름이었고, 커다란 눈동자 무늬의 
대적반은 양방향의 기류가 스쳐지나는 경계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폭풍이었다. 위성 이오의 화산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주 공간에 유황을 뿜어대고 있었다. 토성의 고리가 
몇 겹인지 알게 되었고, 고리를 이루는 물질이 흩어지지 않게 
질서를 유지하는 ‘양치기‘ 위성들을 발견했다.

목성과 토성의 위성 여럿을 발견한 뒤 보이지 2호는 천왕성으로, 그리고 해왕성으로 향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천왕성, 해왕성의 
근접 사진은 모두 1980년대에 보이저 2호가 찍어서, 
카세트테이프보다 더 구식의 테이프에 저장했다가 지구로 전송해온 것이다. 

2006년에 명왕성을 탐사하러 간 뉴호라이즌스 탐사선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가까이에서본 다른 행성이라고는 
목성뿐이다. - P151

이름과는 달리 발사가 지연되어 2호보다 한발 늦게 지구를 떠난 보이저 1호는 토성 근처에서 조금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천왕성, 해왕성의 방문을 포기하는 대신 일부러 토성의 위성 
타이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지만, 타이탄이무척 두터운 대기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체를 
구성하는 데 쓰일 수도 있는 유기물질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
했다. 
그 관측자료를 지구로 전송하는 임무까지 모두 마친 뒤 1호도 
2호처럼 태양계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춥고 어두워지는 
우주를 향해 더는기약도 없는 고독한 여행길에 올랐다.
- P151

프로게이머 페이커의 할머니께서 손주의 경기 생중계를 즐겨 
보시며 게임 용어를 줄줄 꿰고 계신다는 인터뷰를 보고 흠칫 
놀랐다. 
모두가 그런 판타스틱 할머니를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릴 땐 숙제하다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요즘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부모님은 각자 나름의 인생에서 대가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은 그방향이 아니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 수록 부모님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 P154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P156

예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비밀번호 분실 대비용 질문을 고르고 그에 대한 답을 적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려동물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영화 제목 따위의, 본인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치트키를 설정해두라는 귀여운 요구였다. 
골라둔 질문과 답을 모두 맞히면 비밀번호를 새로 정할 수 있게 
해줬다. 
나는 질문 중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책은?"을 고르고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를 적어넣곤 했다. 
문고본의 해진 책등에 테이프를 덧발라가며 그야말로
닳도록 읽은 책이다.
- P157

어린 왕자는 해 지는 광경이 좋다고 했다. 나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철 지루한 장마 끝의 노을을 사랑한다. 마치 솜사탕을 여기저기 헤쳐놓은 듯 색깔도 높이도 서로 다른 구름층이 
여러 갈래로 휘몰아치다 갑자기 멈춘 듯한 하늘. 그 역동적인 
하늘에 내려앉는 노을은 어찌나 붉고 또 어찌나 강렬한 
황금색인지. 
그렇게 황홀한 황혼은 태양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지구에서 태어난 나를 칭찬한다.
- P158

사실 그의 소행성은 아주 작아서, 반대쪽으로 움직여도 밤, 일출, 낮을 빠르게 거친 뒤 금세 다시 일몰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분위기는 좀 다르겠지만, 
내가 어린 왕자라면 의자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 P160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
하루가 엄청나게 기니까 일몰도 오랫동안 볼 수 있다. 게다가 
수성은 태양 가까이에 있어서, 해가 지구에서보다 두세 배 크게 보인다. 거대한 태양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에 닿을 때부터 위쪽 끝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열여섯 시간. 지구에서는 해 지는 시간이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
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
일지 모른다.
- P162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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