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한 가지 주제에 오롯이 집중해 화장실 가는 것도 잊는 그런 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 P78
외국 연구자들과 영어로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들의 메일이 "Enjoy!"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 어젯밤 새로 관측한 자료를 분석 담당 동료에게 보낸다든지 할 때, 파일을 첨부하면서 "자, 즐겨!" 하고 적어보내는 것이다.
내 지도교수께서는 그런 메일을받고 나면 "이 친구는 머리 아픈 걸 보내주면서 뭘 즐기라고한다니" 하며 괜스레 핀잔 섞인 한마디를 하시는데, 사실 본인도 이미 즐거움에 미소를 짓고 계신다. 그런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도 일의 즐거움 중 하나라는 듯이. 그리고 그런 분을,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천문대에 관측 제안서를 쓰고 모델을 만들고 논문도 쓰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매일 만끽하며 지내는 분을 지도교수로 두었다는 사실이 내게도 일의 즐거움 중 하나다. - P79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센터, 피카소 미술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바티칸의 대성당까지, 많은 예술작품을 감상했건만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의 감흥밖에 전해주지 못했다.
물론, 성베드로 성당의 기둥이나 조각상, 금빛으로 눈부신 클림트의 그림들처럼 그저 보기만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작품도 많았지만,
로마의 포로 로마노는 누가 그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저 폐허에 지나지 않았고, 원근법이 널리 쓰이기 전의 그림들은 초등학생이 조금 잘 그린 그림일기처럼 보였다. - P82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서양 과학이 싹트고 무르익고 우거진 그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천문학 커녕 과학에 관련된 어떠한 장소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체코의 프라하 천문시계를 구경한 것은 단지 그곳이 남들도 다 가는 유명 관광지이기 때문이었다. - P83
신호대기중이던 택시 블랙박스에 UFO 같은 게 찍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했다. 무언가 불타오르는 것이 하늘에서 움직이면서 밝게 빛나던데 운석이겠느냐고 물었다.
땅에 떨어져야 운석이고, 아직 떨어지기 전에 불타고 있는 건 유성이라 부른다고 대답했다. - P88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은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소시오패스라서 밤하늘 혹은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직업을 떠올린 것일까. 나도 이 직업을 선택할 때는 천문학자가 사회에 나올 일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잘알지 못했다. ... 인터뷰 요청을 받는 등대지기의 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천문학자의 경우 ‘사회의 부름에는 대체로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천문학을 비롯한 많은 과학 분야가 국민이 낸 소중한 세금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으며, 과학계 종사자임을 밝히면 듣는 사람은 대개 "오~"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이 직업을 존중해준다.
물심양면 지지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한다. - P91
과학자들의 의심은 남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습격당한다.
일찍이 철학자 데카르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했던가. 과학자들은 그 말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다.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 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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