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갔더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 교수님께 기본천문학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 연세에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셔서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 무관이라고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릴 때면 어찌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쿡쿡 웃었다. 칠판에 별을 그릴 일은 자주 있었다. 중요한 부분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보이는 그대로 별을 논하니까 별. 성단을 논하니까 또 별. - P12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그날 친구는 화가가 먹고사는 방법에 대해 끝내 한마다도 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천문학자가 어떻게 경제적 궁핍을 면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는데, 사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신 헤어질 무렵, 친구는 내가 천문학자가 되어서 좋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무엇이어도 좋았지만, 열정적이고 무해하고 아름다운 화가라는 점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숨막히게 아름다웠던 잡지 속 우주로부터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향해, 한 사람은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 P14
흔히 천문대는 반구형의 지붕을 이고 있다. 관측할 때면 지붕 일부가 열린다. 자동차 선루프처럼 위로 혹은 옆으로 열려 하늘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천창을 만든다. 망원경이 하늘의 다른 부분을 볼 때는 시야가 가려지지 않도록 망원경의 방향에 맞게 돔이 통째로 돌아간다. 학교 천문대의 돔을 점검할 때 위로 올라가 열린 부분으로 나가보면, 약간 무섭긴 해도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 P18
상당한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 후,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타이탄 전공자‘가 되어 대학원을 졸업했다.
물론 모든 박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남의 연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에게 주는 학위는 없기 때문이다. ... 국내 천문학계는 대단히 좁은데, 천문학의 범위는 천문학적으로 넓어서 관심을 줄 대상이 너무 많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외롭지만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 P23
그리고 동시대에 존재하는 초보 행성과학자들에게만 주어진, 타이탄을 최초로 목격하는 그 행운을 두고두고 곱씹었다.
그런 걸 생각할 때면, 엔셀라두스, 피비, 아이아페투스…… 읽기도 힘든 토성의 수많은 위성들의 이름이 우주로 날아오르는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 P24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P31
과장, 차장이나 중령, 대령은 몇 년 후에 칭호가 바뀌는데, 박사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여전히 박사라고 불릴 수 있으니 세상 간편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죽으면 비문에도 ‘박사‘라고 새긴다나. 박사가 되는 것은 내 이름 외에 불멸의 호칭을 하나 더 갖게되는 것이다. - P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