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기는 사마의 더봄 평전 시리즈 1
친타오 지음, 박소정 옮김 / 더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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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혔던 책인데, 중간에 시험기간이 껴있어서 구매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후기를 써보게 되었다. 사실 삼국지 이름을 앞세운 자기개발서류의 불쏘씨개들을 퍽 싫어하는 편에 속한다. 아주 어렸을 때는 몇 번 속기도 했었다. 옛날에는 보통 조조, 제갈량을 앞세워 그런 불쏘씨개들을 많이 팔았는데 요즘에는 사마의가 많이 소환되는 거 같다. 이 책도 그런 편견이 있어서 살 생각이 없었으나 내용이 그런 자기개발서류가 아니라 고증도 철저하고 그냥 사마의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삼국시대를 다룬다고 하여 구매를 하게 되었다.

책은 재밌고 술술 읽힌다. 첨언하자면 삼국지에 관심이 많고 몇 년 전 방영한 [대군사 사마의 호소용음]을 본 사람이라면 사실 다 아는 내용이다. 사마의에 대한 캐릭터성이 다르긴 하지만 다 아는 내용이어서 막 엄청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삼국지 관련 콘텐츠는 사실 다 아는 내용이어도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는 재미가 있으니 아는 내용이라는 것이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신박했던 것은 사마씨 집안이 원래는 무인 집안이었다가 사마의 몇 대전에 문인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과 집권 초기 조상에 대한 재평가, 조예 사망 과정에서 나타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 것, 그리고 고평릉 사변에서 환범의 역할과 같은 것들은 생각할 거리를 퍽 던져줬다. 환범이 고구마를 얼마나 먹은 기분이었을지 상상만 해보아도 나도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옛날 같으면 어휴 멍청한 조상이라고 씹었겠지만 요새는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우리야 역사를 거의 전지한 입장에서 보는 거고 사람이란 게 급변을 당해도 침착하게 세상을 바둑판으로 볼 수 있지가 않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은 조상같이 행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가 옳고 그름이라면 인생사 편할 것이지만 대부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옳은 것과 편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를 택하면서 살고 평상시에 전자를 택하던 사람들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후자를 택하는 경향이 많은 거 같다. 어쩌면 생존 본능적인 면모일 것이고 그걸 극복하고 세상을 바둑판으로 보는 인물들이 안 좋은 말로 하면 좀 싸패끼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게 술이부작의 자세인가 출처 표시가 명확한 거 같지 않아 좀 불편했다. 소설적 면모도 조금 유치해 보이기도 했다. 읽다 보니 친타오 교수가 전문 역사서와 대중역사서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전문적인 내용이 들어가면서도 대중성을 갖추기 위해 소설적 도구도 사용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적 면모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고평릉 사변 때 사마의가 독백하는 장면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마의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스스로는 자기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마의는 남들이 참지 못하는 모욕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참아 넘기나 남들이 잘 참는 아니 모욕이라고 느끼지도 못하는 내 머리 위에서 전횡을 일삼으며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비유하자면 내 바로 앞에서 욕하는 시정잡배 한 사람과 나라를 전횡하는 난신 한 사람 둘 중 누구에게 더 모욕감을 느끼는가?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본능적으로 전자에서 더 모욕감을 느낄 것이고 진정으로 후자에서 더 모욕감을 느끼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고평릉 사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점이 그런 부분이었다. 아니 굳이 왜? 조상과의 관계가 그 정도로 험악했던 것도 아니고 아들들의 출세길도 그렇게 막힌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본인은 해볼 거 다해본 일흔 넘은 노인이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나이지만 당시에는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나이이다. 인생의 말년에 와서 그런 담대한 선택을 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은퇴도 했고 역사의 다음 장면은 자식들에게 맡기면 될 것이 아닌가? 친타오 교수가 사마의의 독백 형식으로 제시한 존엄성 문제는 그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적절했다고 본다.

상당히 재밌는 책이었고 충분히 권할만한 책이다. 저자가 사마의를 마냥 숭배하는 것도 아니고 부록에서는 오히려 퍽 비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나 또한 사마의에게는 양가감정이 있는 거 같다. 숭앙하는 점도 있지만 혐오스러운 점도 있다. 대표적으로 망탁조의로 세트로 묶여서 역적 취급당하기도 했고 석륵은 조맹덕이나 사마중달같이 고아나 과부를 이용해먹기는 싫다고 까기도 했다. 그런 대중적인 비판도 있지만 나는 사마의의 가치관이 어떠했냐를 따져보고 싶다. 사마의에게 효와 충, 두 가지 가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사마의는 주저 없이 효를 고를 것이라 생각한다. 사마의의 일생에서 언제나 중요했던 것은 나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이게 뭐 나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현대인 대부분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출세를 했고 군주를 섬겼으며 제갈량과 겨루어도 보고 말년에는 정변도 일으켰다. 개인으로는 그걸 나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시대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하다 보니 결국 천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천하를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적성이 애당초 결여되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사명이 있고 그 시대에 천하를 가진 사람은 나름의 사명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무수한 영웅들이 쏟아져 나와 자신의 사명을 시대에 적용시키려고 천하를 다투었으나 결국 천하를 얻은 자는 가족을 지키려던 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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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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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소설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일찍이 생각은 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워낙 생각의 흥분을 자극하는 데에 도가 텄기 때문에 쉽사리 페이지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도 쿤데라스럽게 적어보려고 한다. 쿤데라를 처음 접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로 사랑을 다룬 책을,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가 호감이 되는 토마시가 등장하는 책을 내가 감히 거부나 할 수 있었을까?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나 나는 오히려 친절하게 느꼈다. 이 캐릭터를 어떻게 잉태했고 어떻게 출산했는지를 다 알려주다니! 본인에 가장 내밀한 순간일진대 너무나 고마운 일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워낙 감명 깊게 읽어서 당시 내가 참 사랑하던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 마음은 반반이었다. 나도 감명받고 읽었으니 너도 감명을 받아보라는 생각과 그동안 부려온 지적 허울을 다 벗겨버리자라는 생각, 둘 다 퍽 건전하지는 못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중도 포기할 거라고 짐짓 예상했는데 의외로 다 읽었다. 읽지 않았는데 읽었다고 구태여 거짓말할 인사는 아니었다. 그 소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그녀 머리카락을 한가닥 쥐어뜯더니 책 중간에 책갈피처럼 끼웠다. 참 쿤데라스럽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작 중에서 쿤데라 씨가 아베나리우스 교수에게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짓고 싶다고 토로한다.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이미 그 제목은 쓰지 않았냐는 질문에 쿤데라 씨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한다. 나는 ‘불멸’이라는 제목도 퍽 마음에 든다. 불멸이란 나도 깊이 생각해본 주제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닐까,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데 불멸이 될 수가 없는데 이렇게 죽다니, 내가 죽고 불멸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죽음이 전혀 두려울 거 같지 않다. 괴테와 베토벤이 죽음이 두려웠을까? 이 소설은 총 7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2부에 갑자기 괴테의 이야기가 나와서 순간적으로 이게 단편소설 7개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여러 명의 시선으로 소설을 전개하지만 거미줄처럼 다 이어져있고 그 이음새를 발견할 때는 희열까지 느끼게 된다. ‘불멸’을 제대로 맛보려면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괴테, 베토벤의 개인사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의 내용들을 쿤데라 씨는 이미 독자가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전개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 채로 읽으면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만 등장을 시켜서 나는 그 사람들과 친해진 것이 다 지금을 위한 것이었나라는 운명론에 빠져들기도 했다. 내가 7년 전 에커만을 따라 괴테를 만나러 간 것이 다 지금을 위한 것이었나?



쿤데라 씨가 창작한 아녜스, 폴, 로라와 같은 주요 인물 못지않게 과거 실존 인물들도 비중 있게 소설에 등장한다. 심지어 나폴레옹과 괴테가 만나는 모습도 묘사해놨다. 실존 인물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소설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이다. 불멸을 다루며 괴테를 앞장 세운 것은 이게 만국 공통인지 쿤데라가 나와 취향이 비슷한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멸하면 괴테가 연상되기는 한다. 하지만 괴테와 육체적 관계는 맺기 싫다. 도스토옙스키나 헤밍웨이와는 즐겁게 관계를 맺을 거 같은데 괴테에게선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거 같다. 왜 일까? 에커만이 나에게 괴테에 대해 말할 때 찬사에 섞여 그를 중상모략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본질적으로 괴테에게선 나만 맡을 수 있는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나는 옛날부터 냄새에 민감했던 거 같다.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불쾌한 냄새가 나면 호감도가 확 떨어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는 옅게나마 냄새가 났고 ‘파우스트’를 읽을 때는 대놓고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괴테를 불멸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생각은 없다. 괴테는 냄새는 좀 날지언정 고마운 사람이다. 에커만이 괴테에게 나를 소개해줬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내가 사랑하는 그 불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괘씸한 것은 쿤데라 씨이다. 나는 고전을 좋아한다. ‘고전적이다’라는 말은 내게 있어 최고의 찬사이다. 그래서 항상 죽은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물론 필요에 의해 살아있는 작가들의 책도 읽은 적도 퍽 있으나 그들이 불멸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내게 있어 불멸에 오른 사람들 니체, 도스토옙스키, 베토벤 등은 다 죽은 사람이다. 죽었기에 완성되었고 불멸이 된 것이다. 크로이소스가 솔론으로부터 ‘행복하다’라는 소리를 못 들은 이유도 같지 않은가? 살아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어떻게 불멸이라 할 수 있냐 이 말이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쿤데라 씨는 내게 불멸이 되어 버렸다. 쿤데라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에 나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무려 92세로 그는 아직 살아있다. 근데 이미 내게 불멸이 되어버렸다. 퍽 수치스러운 일이고 나중에 죽은 불멸들이 내게 심문하면 뭐라 변명할지 아찔 하기만 하다. 그는 구십넘은 노인이니 산송장으로 쳐야 한다라고 변명해야 할까, 아니면 살아있는지 몰랐다고 변명해야 할까?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로 불멸의 인물들이 나온다. 괴테, 베토벤, 헤밍웨이 등등 불멸의 이름들이 퍽 많이도 등장한다. 그리고 쿤데라 씨가 창작한 폴, 로라, 아녜스도 등장한다. 폴과 로라와 안면이 있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쿤데라 씨가 만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쿤데라 씨의 음흉한 속셈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폴과 로라와 만난 쿤데라 씨를 봤을 때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쿤데라 씨는 산 자를 불멸의 위치에 놓은 내 사고를 교모히 조종했노라고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제 뭐 어쩌겠는가 92살 먹은 쿤데라 씨보다 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수밖에, 내 불멸들은 하나 같이 죽은 지 오래되었으니 쿤데라 씨가 죽고 한참 뒤에 내가 죽는다면 헷갈려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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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펭귄클래식 1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조혜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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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익히 들어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도스토옙스키가 관념적인 '위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올해 초 대전에 사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읽던 책이 이 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하인'처럼 살고 있는 친구라서 쓴웃음이 지어진다. 분량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난해하다고 소문이 나서 선뜻 구매하지는 못했다. 주기적으로 도스토옙스키를 복용하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몸이 되어버린지라 '미성년'과 '지하로부터의 수기' 두 개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미성년'의 미흡함이 꺼림칙해서 결국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선택하였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특유의 장광설 같은 느낌이 많이 들어 읽기에 힘들었다. 시간 순서로는 2부가 먼저라고 한다. 2부 서두에 24살 때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밝혀 1부보다 2부가 훨씬 옛날 일인 것을 표방하고 있다. 더 옛날 일을 2부로 배치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1부의 지하인은 물론 장광설만 지껄이고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지만 단단한 사람 같았다. '단단함' 이란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을 많이 하지만 여기서는 긍부정 모두를 함의한다. 1부의 지하인은 타인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홀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여러 충동을 만족시키고 비틀어진 생각들을 나열한다. 거기서 특유의 뒤틀림은 느낄 수 있었지만 나약함은 찾을 수 없었다. 2부의 지하인은 나약한 면모를 너무나 많이 보인다. 그 나약한 면모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항상 시작된다. 소심함, 열등감을 보이며 그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위태롭고 나약해진다.



그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억지로 끼어드는 대목은 나까지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까지 지하인을 내켜하지 않는 무리들과 교류를 하려 하는지,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한 데도 왜 그런는지 궁금했다. 특유의 반항심 아니면 억압된 것의 분출 그 정도로 처음에는 해석했다. 리자와의 관계에서는 반대의 경우라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모욕을 주려 하는 것은 뭐 나름의 싫은 이유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자신에게 순수한 마음을 품는 리자에게도 모욕을 주는 행동은 미성숙한 면모가 부각되었다.



지하인은 결국 리자에게 돈을 쥐어줌으로써 모욕을 준다. 행위를 후회하고 리자를 찾아 나서나 결국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도스토옙스키가 1부, 2부 배치를 한 것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완전하고 단단해 보이나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 나약한 면모가 드러나는 것을 더 완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배치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구성이 '몰락'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몰락'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각자 자신만의 산에서 내려온다는 의미로, 세상과 타인과 대면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지하인'은 결국 몰락이 없는 지하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책에서 읽은' 생각들로 무장한다. 완전하고 단단한 것이 좋아 보이지만 인간에게는 나약한 면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한 뒤틀림이다. 우리 모두는 몰락해야 한다. 타인과의 교류와 관계에서 끊임없이 몰락해야 한다. 지하로 들어간 결말이 절망적이라고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여기서 1부와 2부의 배치를 생각했다. '지하인'이 다시 몰락을 위해 나갈 것이고 끊임없이 몰락하리라는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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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원정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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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니체가 퍽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준 적이 있다. 존경하는 영웅 한 사람을 떠올려 보고 그 영웅을 따라 해 보란 것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영웅 속에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선 내가 존경하는 영웅을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도전되는 말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영웅은 사실 퍽 많다. 시기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존경에 동질감을 덧붙여 나는 카이사르를 꼽았다. 내가 카이사르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태어난 달이 같아서인지, 둘째 아들의 장남이라는 점도 뭐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많지만 사실 그냥 동질감을 강렬하게 느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내가 직접 칼에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역사책이나 소설 같은 창작물에서 본 카이사르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본질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카이사르와 직접 만나보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간접적으로 그와 만나는 방법은 그가 직접 쓴 글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서문화사에서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를 합쳐서 더 싼 가격에 판매했지만, 표지 디자인과 번역 수준이 천병희 씨가 번역한 것이 우수하다고 하여 천병희 번역본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도부터 우스운 짓이었다. 우리가 존경하는 영웅이란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다름없다. 현재 만나는 사람들조차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미지로 여기는데 2천년전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다니 아주 우스운 짓이다.



‘갈리아 원정기’ 는 3인칭으로 서술되어있다. 카이사르가 뭐 뭐 했다. 이런 식의 서술이 많아서 3인칭 서술이라는 것을 모르면 이게 카이사르가 쓴 게 맞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것이나 점점 읽다 보면 특유의 서술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감상은 재미없는 일기장 느낌이었다. 군사적인 보고서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갈리아의 부족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선진적인 부분이 많았다. 로마에 비교하여 야만적이란 거지 군사를 운용하는 것이나 함선의 규모, 요새와 해자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점을 볼 때 동시대 다른 지역의 문명 수준을 생각하면 결코 야만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카이사르도 갈리아의 부족들을 무조건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갈리아 원정’이라고 하면 영웅 과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12 과업이 현실화한 것이다. 그 후 많은 영웅이 군공을 쌓기 위해 자신의 갈리아로 달려갔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며 대놓고 갈리아 원정과 비교할 정도이니 영웅들은 모두 자신만의 갈리아가 필요하다.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며 카이사르가 서술한 ‘갈리아 전기’는 끝이 난다. 뒤에 부분은 히르티우스가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 장면은 그림으로도 많이 그려져서 기대되는 장면이었지만 역시나 그냥 담백하게 기술되었다. 자신을 들여다보려면 자신이 좋아하는 영웅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된다. 내가 카이사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치밀하게 자신을 통제하여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카이사르의 군사적 능력은 그의 비판자조차 인정한다. 하지만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라 순발력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고 무엇보다 군사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이끌어나가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기에 보고 배울 스타일은 아닐 거 같다. 어릴 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책으로는 처음 카이사르를 접했다. 그때 인상 깊게 읽은 구절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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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서광>을 읽다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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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침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니체의 “서광”을 원전으로 한 강독서이다. 고병권 씨의 “다이너마이트 니체”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여 이 책도 구매하였다. 전체적으로 깔끔했지만 “다이너마이트 니체”와 중복되는 부분도 많은 거 같고 “서광” 자체가 “선악의 저편” 보다도 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니체” 보다는 만족감이 적었던 거 같다. 물론 비교해서 만족감이 적었던 것이고 마음을 울리는 대목도 많이 있어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황혼의 미네르바”와 니체의 “서광”을 비교하는 것은 퍽 흥미로웠다. 보통 지혜를 황혼에서 많이들 찾는다. 황혼에서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지혜를 우러러본다. 하지만 황혼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는다. 황혼은 필수적으로 피로를 동반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녁 시간대에 안락을 원하고 노년기에는 안식을 원한다. 피로는 정신을 변질시키기 마련이기에 황혼의 때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간이 아니다. 새벽, 즉 “서광”의 때가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은 부담스러울 수가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또 산더미라는 걱정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안락을 찾지 않게 되고 정신을 단련하게 되는 것이다. 시작하는 때는 항상 “서광” 이어야 한다.



근대의 잡식성과 고대의 순수성을 비교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니체가 근대인을 비판하는 점에서는 ‘이상’ 이 생각났다. 당시 일제 치하 경성을 양복을 입은 절름발이라고 비유하며 조선의 모조 근대를 말했다. 우리나라 역사의 “근대 부재”와 관련하여 니체의 근대 비판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니체의 근대 비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신선했다. 물론 니체가 상정한 “고대”란 “역사적 고대”와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상당히 신화적 색이 입혀진 “고대” 이고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 상정한 개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나는 대목은 고대와 근대의 맹세의 무게의 차이였다. 자기가 약속한 것, 신 앞에서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던지는 고대인을 근대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근대인의 말의 무게는 너무나 가볍다. 고대인의 그런 행위에 근대인은 조소를 보내기도 하나 고대인이 맹세를 목숨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결국 자기 확신이다. 신 앞에서의 맹세는 결국 자신과의 맹세이다. 고귀한 자의 말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을 믿기에 자신의 말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한다. 근대인은 위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행동을 꺼리고 가만히 편안함을 누리기를 원한다. 그에 반해 고대인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항상 행동하며 살아간다. 내 말의 무게는 어떠했는가? 내 맹세의 무게는 어떠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아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으로 소유를 내놓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말한 소유는 ‘재산을 가지다’는 소유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정신, 기억, 충동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위대한 사람은 시대를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감각과 관련해서 수년 전 해부학 수업 시간에 당장 같은 보라색을 보아도 모든 사람이 제각각 조금씩은 다른 색으로 인식한다. 라는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인 내용을 들은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사람의 감각이 이렇게 다르기에 합리적 이성에 따른 인식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금은 다른 결론을 내놓았다. 인식하는 사람 수 만큼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이 각자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나의 세계가, 나의 시대가 나의 것임을 확인하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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