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고려사 1 -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 박시백의 고려사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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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신간이다. 박시백의 '조조록'을 워낙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고려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속으로 호들갑을 다 떨면서 구매했다. 내가 '조조록'을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친구 류 모 군 덕택에 일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심심풀이로 가끔 꺼내 볼 정도로 좋아하는 만화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조선왕조실록의 디테일한 부분,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이 매력적이었다. 


'고려사'도 '조조록'과 같이 태조-혜종 실록, 정종-광종 실록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대별로 5권으로 출간한다고 한다. '조조록'이 20권이었던 거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분량이라 실망스러웠다. 고려 실록이란 것이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고 2차 사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자료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을 거 같다. 택배를 받자마자 포장을 뜯어 단숨에 읽어내렸다. 


총평을 말해주자면, 혹시 '조조록'의 향수에 젖어 그런 느낌을 원한다면 사실 실망이 클 수 있다. '조조록' 때는 재위 기간이 짧은 왕들도 꽤나 세세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는데 '고려사'에서는 태조를 제외하고서는 광종도 분량이 빈약하며 혜종과 정종은 '조조록' 때의 일개 재상보다 분량이 적은 기분이었다. 추존왕의 추존 과정이나 묘호를 어떻게 정했는가 같이 세세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조조록'의 큰 매력이었는데 '고려사'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비하면 '고려사'는 빈약한 사료이고 거기다가 고려 초의 내용은 삼국사기도 더하여 참고하여야 하는데 삼국사기는 더욱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사실 작가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애당초 사료가 적어서 그렇다. 하지만 굵직한 인물에 대한 평을 좀 넣어서라도 분량을 늘렸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고려사 자체가 기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인물평을 하기에는 오히려 실록보다 적합할 터인데, 그런 평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년체 사서인 '고려사절요'와 같은 느낌이다. 5권에 완결된다고 했으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지만 '고려사'의 기록이 성종 이후에는 꽤나 풍성해진다고 하니 기대를 걸어본다. 2권 나오면 또 호들갑 떨면서 사겠지만 실록의 디테일함을 살리지 못한다면 기년체 사서 특유의 인물론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고언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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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거장들
박찬국 지음 / 이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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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다시 현대 철학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현대 철학 중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파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난해함을 몇 번 맛본 적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명제를 다루는 수리적 방법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읽으려면 머리를 풀가동하고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읽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독서는 정신을 이완시키고 소일거리를 하는 용도라고 생각하기에 비트겐슈타인에게 제대로 들어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현대 철학 관련 도서 중 가성비 좋다고 하여 이 책을 추천받았다. 저자가 박찬국 교수고 비트겐슈타인도 들어있어 큰 고민하지 않고 주문하였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철학자들은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하버마스, 푸코, 비트겐슈타인, 포퍼 총 8인이다. 철학사에 방귀 좀 뀐다는 사람들을 다 모아둔 기분이다. 책 자체도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니고 그걸 철학자마다 파트를 나눴으니 한 사람당 분량은 적다고 하면 적은 수준이다. 저자가 관록이 있어서 그런지 적은 분량에도 철학자의 핵심 주제들을 다 담아내었다. 8명 대부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키르케고르, 니체,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퍽 좋아하는 철학자에 속하며 푸코도 최근에 본 영상이 있어 반가웠다. 책을 빨리 읽어내는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일도 많고 진득하게 책을 잡을 기회가 잘 안 생겨서 의외로 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나 니체 파트를 읽으며 고양되었던 부분들이 많았던 기억은 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키르케고르는 1단계 2단계 3단계로 늘 나누는 익히 알던 내용이었고 키르케고르의 실존이 내 취향에 맞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읽은 거 같다. 니체 파트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한 오해는 아닐 것이고 아마 시간이 지나며 기억에 오류가 생겼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능동적 니힐리즘, 즉 가치의 전환에 대해서 최근 들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니힐리즘에 낭만주의를 더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계속 뒤이었다. 그 질문에 완전한 해답은 아니겠지만 내가 니체가 말한 '가치의 전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부분은 해소할 수 있었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란 기존의 가치들 대신에 새로운 가치들을 정립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들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 변화된다는 것, 다시 말해 가치 정립의 원리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가치 정립을 반복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의미한다.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서도 개념을 더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무엇일까 해서 착안한 개념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희미해진 거 같다. 철학적 사고도 계속 날카롭게 해줘야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니체에게서 들은 나 자신을 강하게, 고양시켜라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거 같다. 그리고 저자가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운명으로부터의 도피, 헤겔을 운명을 합리화하는 운명과의 타협,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를 운명과의 무망한 대립으로 비유하고 니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운명과의 화해를 꾀한다고 말한 점도 철학사를 꿰뚫는 인상 깊은 대목이었다. 말하다 보니 니체 파트에 관한 감상이 분량을 많이 차지했는데 개인적 호감에 따른 것이니 이해 바란다.

하이데거는 8명의 철학자 중 가장 읽기 지루했다. 오염된 언어가 많다고 언어부터 새로 설정한 사람이니 각오는 했지만 무척 잘 읽히지 않았다. 푸코는 퍽 흥미롭게 읽었다. '광기의 역사'와 관련해서 영상을 봐서 그런지 이해가 퍽 잘 되었고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이 재밌었다. 동일한 시대에 서로 다른 에피스테메들이 경합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예시로 저자가 우리나라의 의학 분야에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이 공존하고 있다고 밝혀 반갑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 파트도 생각보다 재밌게 읽었다. 과학철학이어서 수리적 개념만 난무할 거라는 걱정도 하였으나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한,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는 지성을 연마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더 높게 평가한 대목에서 약간은 안심했던 거 같다. 실천적 윤리를 추구한 점도, 지성에 기반한 과학에 인류가 매몰되는 것을 경고한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초기에는 언어의 엄밀성을 주장했으나 후기에 가면 맥락을 더 중요시하는 대목은 과거에 읽었던 기억이 나서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다.

포퍼는 신입생 시절 들은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과학의 조건으로 반증을 제시한 것도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하여 힘쓰지 말고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라는 대목이 새로웠고 기억에 남을 거 같다. 행복이란 불분명하며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할 부분이 아니다. 고통은 의식주의 부재같이 명확하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나는 악을 제거하는 것도 선의 실현이라고 생각해왔기에 이것을 분리하여 제시할 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워낙 방대한 내용에 관해 감상을 남기려다 보니 일목요연하지는 않은 거 같다. 그만큼 책이 적은 분량에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가성비 좋은 책이다. 현대 철학의 요점을 훑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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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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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재밌게 읽어서 혹시 다른 에코의 소설들도 나와 잘 맞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바우돌리노'를 구매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바우돌리노'를 리뷰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에코가 비록 대중들을 위해 쓴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특유의 에코체와 중세에 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여 그리 수월치 않고 대중적 인지도도 낮은 소설이라고 소개하여 당시에는 이 책을 보지 않았다. 에코의 소설을 하나 더 읽는다면 그래도 한 번이라도 관심이 간 소설을 읽는 것이 맞다고 여겼고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기에 이 책을 구매하였다.

전체적인 평을 우선 말하자면 무척 재밌게 읽었고 '내가 에코 스타일과 참 잘 맞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잘 안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농민의 아들이 황제의 양자가 되어 겪는 모험활극으로 표현될 수 도 있기 때문에 대중 소설로도 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후반부에서 장르가 갑자기 판타지로 변해서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알고 보니 그러한 것들도 모두 중세에 익히 알려져 있던 전설들을 모티브로 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소설적인 재미로 따지자면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의 양자로 들어가 나름 활약을 하고 파리에서 공부하며 친구들을 사귀는 전반부가 우수했다고 생각한다. 바우돌리노가 활약하는 것들은 모두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처음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의 눈에 들게 된 계기도 바우돌리노가 "성 바우돌리노가 독일의 진정한 귀족은 프리드리히뿐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라고 말했다"라는 나름 그럴듯한 거짓말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바우돌리노는 각종 거짓말과 조작에 능하지만 특히 그가 진면목을 보이는 분야는 성물 조작이었다. 아마도 조작되었을 동방박사의 시신들이 동방풍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서방 교회의 사람들이 감흥을 못 받을 것을 염려해 서방 주교들의 옷으로 시신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장면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이 훗날 동방으로 떠났을 때 돌아온 동방박사들로 여겨지는 것을 예견하는 장면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잘하는 축에 속해서 그런지 바우돌리노에게 심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나와 무척이나 비슷한 면모를 보여서 긍정적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입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정말 뛰어난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을 잘 들키지도 않을뿐더러 상당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해야 하고 퍽 재능이 있어야 한다. 바우돌리노는 황제의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나나 바우돌리노 모두 알듯이 인생의 모든 업적이 허위에 의해 쌓아 졌다는 사실이 치가 떨리도록 싫을 때가 있다. 나는 그래서 바우돌리노가 사제 요한의 왕국에 그토록 집착한 것이 아닐까란 추측을 처음에는 했었다. 사제 요한의 왕국이 인생이 의미가 되어줄 테니깐, 고결한 삶의 목표가 되어줄 테니깐, 그렇다면 내가 허위로 쌓아온 모든 것도 참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나서고 진실로 믿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바우돌리노가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듯 픈다페침이 멸망해가는 와중에 그는 얼떨결에 사제 요한의 왕국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다는 것을 토로해버린다. 히파티아와의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여겨서일까? 아니면 픈다페침에서 살면서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걸까? 바우돌리노가 동방박사의 시신을 조작해서 만들고 심지어 성배까지 만들어내는 모습은 중세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루어지는 성물 매매는 흡사 대단한 비즈니스 같아 보였다. 중세를 대단히 조롱하는 거 같아 보이지만 바우돌리노가 내면에서든 외면에서든 한 번도 자신이 만든 그 많은 허위와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조롱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든 가장 큰 불안감은 혹시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사랑하지 않은 거였으면 어떡하지? 설마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죽인 거였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었다. 아마 나였다면 끝끝내 프리드리히를 사랑했을 것이기에 내가 계속 공감한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배신했다면 내가 계속해서 감정 이입한 바우돌리노가 없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를 누가 죽인지는 구태여 밝히지 않겠다. 바우돌리노도 내가 아마 그랬듯이 프리드리히를 끝까지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바우돌리노가 니케타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소설이 전개된다. 바우돌리노가 서두부터 본인이 거짓말쟁이인 것을 밝혔고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떠나는 여행기는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가인 니케타스는 역사기록에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를 넣지 않기로 한다. 후반부 파프누티오스가 바우돌리노의 이야기에 있는 아주 일부분의 허위를 걷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진실의 잔인성을 드러내 준다. 소설 중간에 진실이 바우돌리노에게 얼마나 잔인했고 파멸로 몰았는지 묘사되지만 마지막 그 진실은 나조차도 잔인함을 실감했다. 바우돌리노는 그 이름대로 성인이 되어도 보았다가 다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떠난다. 이 부분도 다행스러운 장면이었다. 내 추측과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내가 가진 생각도 그것이다. 나의 사제 요한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가? 내 삶에 정당성을 부여할 고귀한 목표는 무엇일까? 에코는 이 책이 거짓말쟁이의 변명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변명이라고 했다. 유토피아에 대한 혹은 고귀한 목표에 대한 열망은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수록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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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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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종종 들었으나,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스토아 철학자로서는 영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오해였을 수도 있지만 금욕주의적 냄새가 나는 스토아 철학에 매력을 못 느꼈기도 하고 말이다. 또한, 철인 황제의 전형으로 아우렐리우스를 우상화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와 아우렐리우스는 상당히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안 읽을 이유만 많았는데, 얼마 전에 그저 강인한 사람의 내면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무작정 구매하게 되었다. 보통 이렇게 구매하면 후회를 하기 나름인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명상록'은 잠언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일관된 내용으로 이어지다기보다는 경구들이 짤막하게 나오는 형태이다. 그래서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술술 읽히지는 않고 계속해서 곱씹어 봐야 하는 책이다.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구들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사색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실용적인 내면 수양의 방법도 많이 나와있다. 지금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여서 메모를 많이 하게 되는 책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생각을 정확히 정의하고 서술하여서 부수적인 곁가지를 다 제거하고 본질을 파악하라는 조언이었다. 생각이 모호하게 나를 괴롭힐 때 적용하면 좋겠다. 또한 내면의 요새를 세우는 것을 권하고 있다. 외부의 모든 것들은 나를 해할 수 없음을 알고 내면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한다.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는 '이성'이다. '이성'이 우리의 본성이며 '이성'을 따르는 삶을 권하고 있다. '이성'은 그 무엇도 해칠 수 없으며 우릴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읽으며 근대 이성주의자가 떠오르기도 했으나 개념은 다른 거 같다. 행복에 관한 서술도 흥미로웠다. "행복이라는 것은 선한 신이거나 우리를 지배하는 선한 이성이다. 감각에 의해 일어나는 망상이여, 그런데 네가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 끼어드는 것이냐" 감각이 행복과 상관없다 라는 경구는 내 생각도 비슷해서 기억에 남았으며 삶과 운명을 대하는 태도 섭리에 관한 의견 등 내가 그동안 쌓아온 생각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이 책을 더 감명 깊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공동체의 유익에 두라고 한다. 그 부분은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사람이 일개 국가나 민족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주의 시민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동포애를 베풀어라는 점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경구도 기억에 남는다. "모든 과거를 그대로 인정하고, 미래를 섭리에 맡기는 가운데, 오직 현재만을 경건과 정의로써 대한다면, 그 즉시 너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태도를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이 너에게 준 운명을 받아들여서 사랑하기 때문이고, 정의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 없이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일의 경중을 가려서 적정한 정도를 지키기 때문이다."



'명상록'이 고대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잠언의 형식이라 나의 후기도 두서없었던 거 같다. 책이 들고 다니기 편해서 곁에 계속 두면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을 울렸던 경구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네가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네가 무수히 실패하는데도 끝까지 추구하고 있는 그 길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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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채희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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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에 관한 지식이 파편적이라고 느껴 한 번 정리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최근 번역된 로렌스의 '유렵사 이야기'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외설 시비가 있는 작가에게 옥스퍼드대학이 역사서를 의뢰했다는 책의 탄생 배경부터가 몹시 흥미로웠다. 최근 '장미의 이름'을 읽고 중세 역사를 다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 이 책을 사게 되었다.



유럽사를 정리한 교양역사서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20세기 초반에 나온 역사서임에도 쉽게 읽히며 단순히 시간 연대기가 아니라 역사를 핵심주제로 분류하여 역사 지식을 정리하기에는 무척 좋은 책이었다. 물론 20세기 초반부에 나왔기에 동양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훈족의 아틸라가 중국 황제와 동등한 조약을 맺었다거나 , 흉노족과 훈족을 동일시하는 서술은 당시 동양 역사에 대한 이해가 무척 부족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대적 한계로 최신 역사연구가 반영되지 않은 것도 아쉬우나 교양 역사서로는 손색이 없다.



서두에서 역사적 인물의 사적인 면모를 탐구하고자 하면 인물이 변질된다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흥미를 끌었다. 셰익스피어의 카이사르와 버나드 쇼의 카이사르, 그리고 실제 카이사르는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사적인 모습이 완연히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카이사르는 엘리자베스 시대적 면모가 들어갈 것이고 버나드 쇼의 카이사르는 빅토리아 시대적 면모가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서술할 때는 사적인 면모는 제하고 공적인 기록에 집중해야 한다는 서술이 공감 가면서도 흥미를 끌었다.



저자는 역사를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거나 구태여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두 가지 방식을 다 거부한다. 오히려 역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로마에서 교황과 황제들로 또 왕들로 그리고 부르주아들로 역사가 어떻게 역동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역사가 순환한다는 일종의 경향성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헤겔의 절대정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내게도 역사는 참 좋은 친구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역사책을 곁에 두고 살았고 언제나 가장 좋아하며 가장 잘하는 과목이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전혀 힘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역사의 유익에 대해 말하며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들 한다. 나는 사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냥 좋고 재밌으니깐 역사책을 계속해서 읽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것이 요즘 세태에 맞으므로 과연 역사에 일가견이 생기면 인생에 무슨 유익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최근에 해보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역사는 인류의 기출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답지는 없는 기출문제이다. 역사적 순간순간에 이랬으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으레 말하고들 하지만 사실 어떤 선택이 좋은 결과를 불러왔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역사를 기계적으로 이해한 경우, 히틀러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함락하고도 들어앉은 거를 보고 모스크바에 집작 하지 않고 군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패망을 자초했듯, 그다지 좋은 결과를 부르지는 못한다. 역사라는 기출문제를 연구하면서 인간사의 경향성을 배울 수 있는 거 같다. 그 경향성을 바탕으로 현시대적 상황을 복합적으로 적용하면 더 좋은 통찰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붙이는 역사의 유익이라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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