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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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상당한 열풍을 일으켰던 책이라 익숙하게 들어봤던 책이다. 아마 어린 시절 읽어 봤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뭔가 이런 부류의 소설은 어린 시절 많이 봤던 거 같은데 요즘은 이상한 아저씨 냄새가 나는 거 같아 꺼리게 되었다. 최근에 한산 영화도 보았고 충무공에게 관심이 많이 가서 난중일기를 읽어볼까 하다가 재미가 없어서 중도 포기하게 될 거 같아서 망설였다. ‘칼의 노래’가 내 생각과는 달리 퍽 난중일기를 잘 구현했다고 해서 한 번 사보기로 했다.



정말 잘 읽히는 소설이다. 동양풍이 느껴지면서 살짝은 무협지 느낌도 난다. 짧게 치는 문장도 마음에 든다. ‘마담 보바리’를 억지로 읽다가 ‘칼의 노래’를 읽으니 집중해서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순전히 충무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정유년에 백의종군하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공에게 있어 가장 힘든 시절이 소설의 시작 지점이니 상당히 지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지난함,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비참함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명량대첩과 노량대첩이 모두 묘사되지만, 실제 전투보다는 공의 내면 심리 묘사가 더 주를 차지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기어코 불멸로 남는 한 인간의 내면을 잘 묘사했다. 일인칭 화자의 심리 묘사가 주를 차지하면 지겨운 느낌이 나기 마련이지만 김훈 씨의 담백한 문장력 때문인지 전혀 지겨움을 느끼지 못했다.



특이하게도 ‘냄새’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람을 떠올릴 때도 공은 냄새를 떠올린다. 아마 이것은 난중일기의 묘사가 아니라 순수 창작일 것이다. 서두에 말했듯 이런 역사소설은 이상한 아저씨 냄새가 나서 싫다고 했다. 그런 나에게 대놓고 냄새를 강요하니 이열치열같이 냄새는 냄새로 치료하는 것인가, 그런 거부감이 사라진 거 같다. 김훈 씨가 최근에 출간한 ‘하얼빈’도 읽고 싶어졌다.



‘지난’하다. 내가 퍽 좋아하는 표현이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내 삶을 한 단어로 말하길 항상 지난했다고 말한 거 같다. 느릴 지에 어려울 난, 느리면서도 어렵다. ‘칼의 노래’에서의 공의 내면도 그래 보였다. 느리면서도 어려웠다. 그 지난함을 인내하여 불멸이 된 공에게 외경심을 갖게 된 거 같다.

‘한산도 밝은 달 아래, 수루에 걸터앉아 큰 칼 옆에 차고 수심 깊어 있을 적에 어이하여 들리는 피리 소리는 애를 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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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2 - 전쟁과 외교, 작지만 강한 고려 박시백의 고려사 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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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1을 리뷰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 2권을 리뷰하게 되었다. 옛날 조조록 시절에는 텀이 적어도 1년 이상 걸렸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몇 달 사이에 바로 나와서 좀 의아하긴 했다. 성종대부터 인종대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특히 현종 이후의 덕종 정종 문종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는 그동안 매체에서 다루어진 적이 전무하기 때문에 잘 다루었으면 신선했을 거 같기도 하지만 그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사실 읽으면서 일관되게 든 느낌은 초등학생 시절 읽던 학습만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야 내용 자체가 새로운 것이니 학습만화만으로 재밌었지만, 박시백 작가의 타겟층이 그리 저연령은 아닐 터 많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작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고려사를 요약한 책이라고 말미에 한 번 더 덧붙인 거 같다. 고려사 자체의 텍스트가 그리 빈약했던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면 사실 그림만 그리고 작가의 생각은 전혀 없는 그런 만화로 전락해버렸다고 하는 탄식이 나왔다. 동북 9성의 위치를 아주 간단히 세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작은 글씨로 이게 작가의 생각과 가깝다고 표시해둔 것을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조조록 시절이라면 몇 페이지를 할애할 분량이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내 모든 비판은 조조 록과 비교해서 나오기 때문에, 아니 그냥 고려사 자체로 봐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이미 나와 있는 천편일률적인 학습만화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사실 조조록이 부상한 것이 그림을 잘 그려서 그런 것보다는 세세한 스토리를 다 풀어주는 그런 맛에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는데 스토리는 그냥 빈약한 고려사 텍스트를 그대로 옮기고 그림만 그리는 것은 특징이랄게 없다.



인물에 대한 언급도 강감찬, 김부식 정도가 그나마 상세하게 언급해준 거 같고 그 외에 인물들에 대해서는 너무 박했다. 특히 전쟁 묘사도 너무 빈약했고 3차 여요전쟁은 2-3페이지 안에 종결해버렸던 거 같다. 이래선 왜 박시백의 고려사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안 나온다. 조조 록 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또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애초에 5권 안에 다 끝내야 하고 원전 텍스트에 대한 양도 차원이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으로 옮기지만 말고 중간에 짚고 넘어가는 시간은 꼭 있었으면 한다. 오랜 팬으로서 참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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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u8324 2022-07-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1권때도 그랬지만. 작가님만의 해석이 별로 없는것은 좀 아쉽더군요.
 
[전자책]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성격 급한 뉴요커, 고대 철학의 지혜를 만나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석기용 옮김 / 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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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소개해주는 영상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책이다. ‘명상록’을 통해 접한 스토아철학에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고 과학자가 쓴 철학책이라는 점도 흥미를 동하게 했다. 하지만 구매를 망설이는 사이 절판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e-book으로 보아야 했다. 일반적인 딱딱한 철학책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작가의 경험을 스토아 철학과 잘 결부시켜 설명하기에 부드럽게 읽을 수 있다. 에픽테토스라는 선생을 설정하여 사고를 이어 나가는 것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렇게 특정 인물을 머릿속에 떠올려 대화하는 형식으로 사고를 전개해 본 경험이 많아 친근감이 들었다.



책의 시작을 ‘곧은 오솔길은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는 신곡의 대목을 인용한 것도 퍽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지 않은 길’을 오랜만에 떠올려 볼 수도 있었으며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내가 철학에 참작하는 이유도 어떻게 보면 몇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최선일까? 나름 그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찾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전히 확신이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스토아 철학에 능통하다고 해서 그런 질문들이 매끄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해보게 해준 거 같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는 점을, 잘 죽는 것이란 결국 고결함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추론해내었다.



스토아 철학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통제의 이분법일 것이다.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그 외에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신경을 끄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보기에 건강, 권력, 재산 등은 모두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 안의 덕성과 성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으니 그런 것들에 신경을 기울이며 살 것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사뭇 체념적인 삶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으나 비유컨대 수레에 목줄이 메여서 가는 개가 억지로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한다면 질질 끌려가겠으나 수레가 가는 길로 맞춰서 간다면 여유롭게 풍경 구경도 하면서 가지 않겠느냐 하는 요지이다. 니체의 운명애 사상도 많이 생각이 났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라는 것도 스토아 철학에서 기억이 남는 부분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내 본성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세상 만물이 흘러가는 법칙이다. 그건 그냥 알기가 힘들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조심스럽게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내 본성도 마찬가지다. 내 욕망이 내 본성이 아니다. 진정 나의 이성을 다듬어서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과녁의 실제 명중은 결심은 하되 욕구될 일은 아니다’



고결성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번 기회로 공고해졌다. ‘고결성’이란 내가 무엇보다 사랑해 마지 않던 개념이다. 내가 하지 못할 것을 염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고결성만 떠올리면 다른 것은 하찮아질 정도로 그 개념 앞에 바짝 엎드렸다. 그 고결성이 고귀한 삶을 만들어주리라는 대목은 무척이나 위로되었다. 정의란 말을 타인을 존엄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이해한 점은 사뭇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항상 타인을 존엄하게 대했는지에 대한 반성도 남겼다. 이미 ‘명상록’에서도 학습한 개념이지만 우리의 감정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인 인상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어 비열하고 비겁한 정신의 원천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이지 않은가? 우리의 고결함을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 죽음조차도 결국 인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에서 가장 실생활에 많이 적용될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 하루 그대가 한 일들을 하나하나 곰곰이 짚어 보기 전까지는 그대의 연약한 눈꺼풀에게 잠을 허용하지 마세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일을 남겨 두었나? 그렇게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당신의 행위들을 검토하세요, 그러면서 수치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꾸짖고, 선한 일들에 대해서는 기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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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케이리디온,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을 때
에픽테토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이소노미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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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케이리디온’ 이라는 말이 다소 생경할 수 있으나, 우리말로 풀어보면 소책자 즉, 핸드북이라는 뜻이다.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이라는 책이 고대 로마 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당대에도 책을 항시 소지하고 싶다는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들고 다니기 편하게 핸드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라는 책을 통해 에픽테토스와 친근해지고는 있었으나 내가 굳이 ‘엥케이리디온’을 사서 계속 들고 다니려고 한 이유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항상 ‘엥케이리디온’을 가방에 넣어서 전쟁터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러했다는데 내가 어찌 안 따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표지 디자인이 참 별로였다. 색감도 그렇고 굳이 번역자의 주관이 담긴 소제목을 저렇게 큼지막하게 박아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담백하게 ‘엥케이리디온’만 적어놔도 될 것을 정말 사기 싫게 표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번역은 퍽 잘 된 거 같다. 읽어나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술술 읽히는 편에 속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었는데 30-40분 만에 다 읽어버렸다. 내용 자체가 많지 않고 격언을 모아둔 느낌도 든다.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나는 핸드북 용도로 이 책을 구매했기 때문에 항상 가방에 넣어두고 틈날 때마다 다시 볼 거 같다. 스토아철학에 대한 진지한 담론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생긴 것은 좀 그래도 두고두고 곁에 둘 친구가 생긴 거 같아서 기분은 좋다. 못생긴 것이 어떻게 보면 스토아 철학과 맞닿는 것도 있는 거 같고, 설마 편집자가 그래서 일부로 못생기게 했나 하는 상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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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배병삼 지음 / 사계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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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란 책 자체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自意로 읽은 것은 아니었고 당시 ‘독서’라는 과목이 있어 선정된 책을 읽게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춘추시대나 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읽기는 어려웠다. 논어를 필두로 한 맹자, 대학, 중용, 흔히 말하는 四書는 맹자를 제외하고서는 공자의 述而不作 정신을 잘 이어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학이나 중용에서는 논어와 시경을 워낙 자주 인용하고, 논어도 시경을 자주 인용하는 거 같다. 공자 스스로가 천명한 술이부작이 유교 경전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시작하기 전 프롤로그에서 사육신을 언급한 것은 논어를 읽기 전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사육신하면 성상문이 지은 수양산에서 도라지 캐 먹던 백이 숙제 이야기를 한 시가 먼저 떠오른다. 이 책에서 ‘사기’에서의 내용도 많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 열전의 첫 번째 편이 바로 ‘백이 숙제’ 편이다. 백이 숙제라는 형제가 주 무왕이 상을 멸하려 군대를 일으켰을 때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 결국 무왕이 상을 멸하자 수양산으로 가서 도라지를 캐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이 열전을 저술하며 말미에 평생을 호화롭게 살다가 천수를 다한 도적 도척을 이야기하면서 의로운 백이 숙제는 굶어죽고 불의한 도척은 천수를 다하는 것을 비교하며 天意가 있느냐고 한탄을 한다. 백이 숙제는 이후로도 상당히 고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선조 때 율곡이이가 당쟁을 막고자 할 때,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이 어디 있냐고 비판을 받았다. 이이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이 있다는 예시로 문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려던 것과 백이 숙제가 무왕을 말린 것은 둘 다 옳은 일이고, 춘추전국시대에 열국들이 서로 싸운 것은 둘 다 그른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교문화권에서 무왕의 지위를 생각했을 때 백이 숙제가 상당히 고평가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사육신을 읽은 후 들은 생각도 백이 숙제 이야기를 한 후 천의가 어디 있냐고 한탄하는 사마천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리를 지킨 성상문 박팽년 등 사육신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의리를 저버린 세조와 신숙주 등은 천수를 누렸으니 정녕 하늘의 뜻이 어디 있을까?

유교 하면 떠오르는 두 글자는 忠, 그리고 孝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논어에서 忠은 그렇게 강조되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는데, 다시 따져보니 춘추시대에 忠을 바칠 곳이 있긴 했을까 한다. 주 天子는 유명무실해졌고, 각기 제후들은 탐욕을 앞세워 전쟁에 몰두하고, 그 밑의 대부들도 언제 배신할까 틈만 보고 있으니 공자가 누구에게 충성하라 가르치겠는가? 충성이란 개념도 아마 중앙집권적 국가가 생겨나면서 생긴 개념일 것이고 공자 당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선진 유학의 틀을 벗어나서, 유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시기는 前漢 시대에 가서야 가능했다. 유학이 동아시아의 대표적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이후의 이야기이다. 유학에서 충을 점점 높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효도 국가 통치에 유용하지만 충을 강조하지 않았으면 유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기는 힘들었으리라

돌이켜보건대, 효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효는 사적 의리이다. 내 가문만을 앞세워서 가족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것이 난세의 특징이 아니던가, 공적 의리인 충은 뒤로 한 채, 사적 의리인 효를 강조하는 역사의 영웅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쌓이지 않았나 싶다. 대표적으로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명목으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인 일과 사마의 가문의 일이 있다. 사마의에게 효와 충, 두 가지 가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사마의는 주저 없이 효를 고를 것이라 생각한다. 사마의에게 일생에서 언제나 중요했던 것은 나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이게 뭐 나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현대인 대부분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출세를 했고 군주를 섬겼으며 제갈량과 겨루어도 보고 말년에는 정변도 일으켰다. 개인으로는 그걸 나쁜다고 할 수 없겠지만 시대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하다 보니 결국 천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천하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적성이 애당초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사명이 있고 그 시대에 천하를 가진 사람은 나름의 사명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공자는 효가 사적 의리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결책을 제시를 했다. 가족에서 이웃으로 사회로 점점 효가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하나 결국 당대는 가문의 안위와 본인의 안위가 일치되는 시기였던 것을 감안해 보면 효가 사적 의리로 빠지는 것이 막기는 힘들지 않았나 싶다. 그것보다는 공자가 주나라 천하의 회복을 부르짖었던 것을 주목해 보고 싶다. 공자가 생각한 공적 의리는 권력자나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후대의 변질된 충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忠 자도 별로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공적 의리는 天이었던 거 같다. 서두에서 우리가 백이 숙제와 사육신을 볼 때 항상 생각하던 그 질문, 과연 하늘의 뜻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공자는 단호하게 있다, 있으니 거기에 마음을 다해라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

요순에서 우로 또 탕으로 문왕에서 무왕과 주공으로 이어진 그 天命을 공자는 굳건히 믿었다. 사실 유학은 상당히 도덕주의 면모가 많아서 춘추시대 같은 난세에 平天下 하기는 어울리지 않는 이념이다. 공자도 현실 경세가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상을 한탄했으나 이후에는 더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천하를 통일한 것은 법가를 앞세운 진나라였다. 유학은 그 이후로도 천하를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다스리기 위한 학문으로 많이 기능을 했다. 춘추시대라는 난세의 한 가운데에서 시대와 사뭇 어울리지는 않아 보이는 仁義를 묵묵히 외치고 요순에서 이어져 온 天命을 굳게 믿으며 살아온 공자를 보며 시대와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는 거 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맹자’에서 공자를 평할 때 나아갈 만할 때 나아갔고, 물러날만할 때 물러갔다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를 알았다는 평을 읽은 기억이 있다. ‘맹자’를 읽을 당시에는 자기 보신을 잘했다는 말인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으나 공자의 모습을 다시 보고 그 문장을 떠올리니 어쩌면 그 난세에 유일하게 天意를 깨달은 공자를 극찬하는 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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