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선고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7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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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읽고 난 감상>

 

카프카를 읽으며 막연히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힘든 이유는 여러가지이고 말하자고 들면 너무 궁색해서 구질구질하다.

게다가 나의 인성에 대해서는 늘 실망스럽기에 '힘들다'는 말을 하는 내가 더욱 싫었다.

그래도 말하고 나면 속이 편안해 질 것 같아 힘든 이유 몇가지만 털어 놓고 싶다.


첫번째,

변신에서 그 '갑충' 그 텍스트 만으로도 불편하여 꾹꾹 참고 읽어야 했다.

나는 살면서 벌레를 늘 의식하고 몹시 두려워 한다.

매우 작은 벌레라도 흉물스럽게 여기기에 삽화가 없는 책만을 골라 들었다.

그러나 결국 꿈 속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 날 아침 가위에 눌렸는데 그 커다란 ... 

아아....지금 글을 적다 떠올리니 우욱 그 이야긴 못 적겠다.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그런 고통을 맛보아야 만한다.

카프카는 결코 쉽게 읽히길 바라며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이 짧은 소설로 내 일상을 모두 전복 시켰다.

매 순간 떠오르는 그 텍스트들에 나는 말 수가 줄기도 했다.

그리고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거기, 내 곁에서 함께 읽을 누구 없소?


두번째,

등장인물들의 행위에 너무 공감하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유별스러울 내가 의식되니 곧 두려워졌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읽으니 등장 인물 모두가 이해가 되었다. 

가족만큼은 '특별히' 개인을 위한 무한한 수용체로 기능해야 안전하다

나는 그 생각에 대해 조금 의문을 갖고 있다.

일탈에서 돌아올 유일한 곳이 가족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가족이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기에 툴툴 거린다.

사람들은 따듯한 가족을 갖지 못할까봐 전전긍긍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욕망을 갖고 사는 나와 대면시킨다.

또,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된 자신을 마주하였다.

어디서건 효용성 유무로 존재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다시 거머쥐어야 하나?

설득되는 동안 불편했다. 


세번째,

그 끔찍한 설정을 읽고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어 보겠다고 노력했다.

그런데 막상 토론 중에 들은 긍정적인 이야기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되보자. 나도 제대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시선과 귀를 그 방향으로 집중하는 것이 도움 되었다. 평안이 찾아들었다.

잠시지만 신이 내리시는 축복이었다.

안타깝게도 질문이 솟구치면서 집중력은 무너져 버렸다. 

내 생각은 다시 비판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좀 더 부정적이지만 아픈 감정을 오래오래 꾸역꾸역 뱉어내면 안되겠는가'.

'여기 그런식으로 파헤쳐 떠들고 싶은 사람 또 누구 또 없소?'

곧 정신을 차리고 그 말들을 삼켰다.

거기엔 그런 사람 없다고 확신했다.

비판적 말버릇이 비난으로 전해질까 두려워 열심히 단속했다.

내가 그동안 배워온 얼치기 긍정화법으로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서둘러 치료하듯 메스로 도려내고 소독하고 바늘로 상처를 꿰매버리는 내가 어리석었다.

그래봐도 나는 계속 아프다고 꿰맨입이 오물거렸다.

며칠 견디다 보면 잊혀지는 순간이 온다고 토닥거렸다.



이렇게 세가지에 걸쳐 불편했던 속마음을 적었다.

그런데 그 외 여러 감정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생각하는것이 나의 취미이지 않은가.

카프카의 작품은 사유를 즐기는 최적의 놀이터였다.

그래서 토론 당일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혼자 숨어서 읽던 책을 이젠 들고 나가 봐도 될 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실존에 대한 물음을 가지며 작품을 다시 읽었다.

결핍에 대한 것들이 생각났다. 개개인의 욕망도 보였다.

욕망들의 충돌로부터 도망쳐나온 자아도 보였다.

불편한 속마음은 현실을 계속 외면하고 싶기에 비롯되었다.



카프카 자료들을 다시 뒤적였다. 

살아있는 작가가 아니어서 일까?

왜,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그가 살아간 시대와 문화를 상세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카프카의 우울한 삶를 들여다 보는 동안 미안함은 들지 않았다. 

어느새 토론일이 다가와왔다.

자료와 단상들을 정리하던 참었다.

문득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름 하나를 떠올리며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잊었던 친구와의 추억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문장을 이어나갔다.

글을 다시 쓰다니.......

 


 

그런 즐거움, 처음이 아니었다.

매우 독특한 맛 초콜릿을 녹여가며 먹는 기분이다.

친구와 여러가지 맛이 나는 사탕을 함께 먹으며 재잘대는 것 같았다. 

연인과 키스를 할 때에 느끼던 그런 즐거움과도 비슷하다.

홀릭되었던 시간이리라.

혀를 감싸고  입안 여기저기에 나의 신경을 끌어가면서도 긴장하고 집중하게 하는 그런 쾌감이었다.

그동안 포기했던 리뷰부터 다시 해볼까 욕심이 생겼다. 

글쓰는 지인들과의 최근 모임을 떠올릴 쯤에 글이 멈춰 섰다.

잉크가 새어 나오는 펜때문에 손이 검게 더렵혀져 있었다. 

술술 잘 써지고 종이에 흡수되는 펜의 느낌이 좋았는데...... 

맥이 풀리고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 자신을 비웃어야 했다. 실소가 나왔다.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런 글로 말뚝을 꾸욱 박아 놓고 나간다.

다시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는 표현이다.

내가 성급하게 한 응급처치에 믿음이 안간다.

언젠가 동류의 인간 혹은 벌레를 만나겠지.

그 때 꿰맨 상처를 다시 터뜨리고 길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



< 생각해 본 논제 >


- 이방인이 되어 '다른'이라는 형용사에 짓눌려 본 경험이 있는가? 그 경험은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항을 미쳤는가

 

- 가족에게서 얻는 위안은 얼마나 다양한가, 그 위안은 가족외 타자와와 관계에서도 가능한 것인가, 또 가족으로 부터 기대되는 그런 위안을 받지 못하였을때 나는 어떻게 견디는가.

 

- 글을 쓴다는 등 예술적 결과물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은 타자들로 부터 느끼는 소외감을 견디는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긍정적인 효과인가

 

- 이 작품은 지금껏 알고 있던 '변신'의 내용 전개는 '역변'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떠오른다. 부정적인 변화를 뜻하는 '역변'또한 긍정적으로 설명될 수 있나.

 

- '긍정', '부정', '결핍', '소외' 에 대한  생각들을 얼마나 자주 하게 되는가. 언제 한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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