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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ㅣ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평점 :
정보라 작가님의 신작 가제본을 처음 펼쳤을 때 차례에 적힌 단편들의 제목을 보며 과연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제본에는 10개의 단편 중 4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 집중하며 글을 읽다 보니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대로 쭉 읽어내렸다. 그만큼 몰입도가 깊었고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파격적이면서도 계속 곱씹어 생각해 볼 여지를 줘서 한번 완독을 하고 다시 한번 더 글을 읽게 되었다.
책을 재독하고 난 뒤 역시, 정보라 작가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하다가 불시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완전히 바뀌어버린 글속의 분위기에 휩쓸려 문장들을 미친 듯이 탐닉하게 되는 경험은 정보라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면 항상 겪게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을 말해보자면 모든 이야기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다 훌륭했지만 나는 책의 제목과 같은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와 <감염>을 고르고 싶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단편인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는 두 명의 남자가 자동차를 타고 가며 시작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두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각각 '두 번째 남자'와 '세 번째 남자'라서 자동차에 탄 사람은 두 명인데 왜 첫 번째 남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없는 건지 작게 의문을 품었었다. 하지만 작가님이 의도하신 바가 있겠지 싶어 지체하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두 남자는 자동차에 부딪힌 까맣고 새빨간 눈을 가진 무언가를 쫓아 골목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자동차의 진로를 막는 느릿하게 걷는 노인을 맞닥뜨리며 두 번째 남자는 노인을 치어버릴까 말했고, 세 번째 남자는 그에 동조하듯 창문을 열고 주변에 cctv 카메라가 있는지 찾아본다. 다행히도 가로등에 달린 cctv 카메라가 있어 그들은 노인을 피해 다른 좁은 골목으로 빠지지만 그곳에서도 아까 전 봤던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불행히도 두 번째 남자는 노인을 다시 치어버릴까 말했고, 세 번째 남자는 그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도 골목 주변에 증거로 남을 수 있는 cctv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다. 나는 이때부터 이 두 남자가 일반적인 도덕관념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방금까지만 해도 평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자동차가 거대한 금속 덩어리로 이루어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살인 흉기로 바뀌려고 했다.
하지만 글의 분위기는 여기서 새롭게 반전된다. 자동차는 노인을 향해 돌진하지 못했고 노인은 공기 중으로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두 남자는 처음의 목적이었던 새빨간 눈을 가진 무언가를 다시 보게 되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멀쩡하던 와이파이 신호가 끊기고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되고 귀신에 홀린 것처럼 운전을 하다 건물의 담벼락에 차를 들이박는 등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오싹한 전조 현상들이 이어진다.
정체 모를 괴이한 것으로부터 도망친 두 남자는 친구 부부의 아파트에서 서로를 새빨간 눈을 가진 새까만 형체의 괴물이라 착각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며 상대를 헤쳤다. 마치 광기에 휩쓸린 것만 같았다. 결국 두 번째 남자를 죽이는데 성공한 세 번째 남자는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기도 전에 새빨간 눈을 가진 새까만 형체에 의해 목이 졸려 죽어버렸다.
아파트의 주인이었던 친구는 술을 사러 나간 상태였고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친구의 부인인 여자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다. 여자는 놀랍게도 새까만 형체인 그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소통까지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새로운 장면으로 전환되기 전 들어가 있는 이 의미심장한 문장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에 뿌려놓았던 복선들을 회수하며 빠르게 진행된다.
경찰과 형사가 찾아온 아파트에서 마침내 이야기의 초반부터 의문의 존재였던 첫 번째 남자가 나타난다. 결혼한 적도 없고 죽은 친구가 남겼다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첫 번째 남자는 집안에서 발견된 시신 두 구에 관한 혐의를 부인하지만 자신의 지문이 찍힌 살해도구와 명백한 증거들로 인해 체포된다.
사건 현장에 처음으로 출동했던 경찰관은 이 모든 사건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 첫 번째 남자와 같은 학교에 다닌 경찰관은 1310호 아파트는 자살한 사람의 집이며 첫 번째 남자는 양아치들을 끌고 다니며 애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등 행실이 좋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경찰관이 던져주는 단서에 복잡했던 내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경찰관 또한 무결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밤중에 사건 현장으로 되돌아간 경찰관은 혹시 남아 있을 학창 시절이 담긴 기록을 찾아 헤매었다. 그는 첫 번째 남자에 대해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했지만 사실은 그 또한 첫 번째 남자와 다를 게 없는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네 번째 남자였던 그는 1310호 아파트에서 이전의 두 남자가 그랬듯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던 붉은 눈을 가진 새까만 형체의 정체를, 친구의 부인이라고 나타났던 여자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새까만 형체는 네 명의 가해자들에 의해 죽게 된 '피해자'이며 그 곁을 지키고 도움을 줬던 여자는 이 이야기의 제목에도 나오는 바로 '죽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 그는 마침내 평온과 안식을 얻고 죽음과 함께 한다.
첫 번째 남자는 살아 있는 채로 자신이 저지른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무거운 죄를 오롯이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첫 번째 단편은 충격적인 반전이 연달아 몰아치는 놀라우면서도 서글픈 이야기였다. 피해자의 원통함이 이렇게라도 풀린 것이 다행이면서도 살아 있을 때는 저 네 명의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정보라 작가님은 현실에서 보았던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좌절했고 안타까워했던 사건들을 공포와 비현실적인 요소를 사용해 날카롭고 예리하게 조명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뿐만 아니라 두 번째 단편인 <감염>에서도 그랬다.
<감염>은 평범했던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의 휴대전화로 전송된 영상에 나온 집단에 의해 폭행당하고 성적으로 끔찍한 일을 당하는 남자와 얽혀 비일상에 발을 걸치며 숨겨진 이야기에 근접하게 되고 사건을 해결하며 점차 폭력적인 충동을 느끼고 갈망하게 되는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며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사람이 타인을 발아래 두고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그 행위에 익숙해지게 되면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었고 속죄하면서도 복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을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하여 현실에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 답을 엿볼 수 있어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를 정보라 작가님이 글 속에서 풀어나가는 방법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서늘하고 오싹한 글의 분위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위로와 응원에 가슴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정보라 작가님의 책이 정식 출간되기 전에 가제본으로 먼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 4개의 단편 외에 나머지 6개의 단편들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궁금해서 정식 출간되는 날이 너무 기다려진다. 앞으로도 정보라 작가님의 활동을 많이 응원하며 아직 읽지 못한 작가님의 책들도 꼭 찾아서 읽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