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초 단위의 동물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2
김병운 외 지음, 민가경 해설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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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작은 흐름의 이행이다. 그다음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책을 보고 싶었던 건 저 두 문장 때문이었다.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불모지에 홀로 서 있는 내가 연상되었다. 통제광인 내게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삶은 재난과 다르지 않다. 끝이 정해진 삶도 내키지 않지만, 전자의 공포가 더 크기에 매사 점검과 반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겠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옹졸함이 크기를 더해가는 요즘 동시에 스스로 꾸짖고 싶은 마음 역시 비대해졌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내게 와서 박힌 문장은 요즘 SNS에서 잘 쓰이는 표현을 빌리자면 매우 폭룡적이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인 흘러간다로 수렴하는 문장이었다니! 일곱 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정체되기를 거부한다. 방향과 속도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거나 지금 여기에서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린다. 상상에 그치지 않고 대놓고 너머의 존재를 찾는다. 나처럼 흔들리고 의심하다가도 나와 달리 낯선 상황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인물들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졌다. 손목이든 뒷덜미든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집이 느껴지는 이야기라니 기묘하지 않은가.

 

김병윤 오프닝 나이트

전시장에 온 나는 여러 인물을 만난다. 초면인데 계속 시선이 얽히더니 묘하게 끌리는 남자, 재회한 지인에게서 옛 연인을 떠올리는 중첩된 관계 속 미로를 종횡무진한다. 시나리오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리듬감이 있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내가 연출자라면 글 속 주요 인물 중 최소한 한 명은 결코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을 테다. 기만의 망령 같은 부터 지워버리겠다.

 

서이제 초 단위의 동물

영화과를 졸업한 작가답게 그녀의 글엔 기본적으로 영화적 기운이 무성한데 이번 작품 역시 로드무비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 속 나와 회사 동료들은 어느 날 하나둘 낯선 곳으로 가더니 금세 지렁이, 달팽이 등의 동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어떤 동물로 바뀌어 있을까. 천적이 많지 않은 상위 포식자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평균 수명이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개념이니까. 작가가 세운 이 세계는 인간의 시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고 말하는 세계, 중요하지만 자꾸 잊게 되는 혹은 애써 잊으려는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성수나 끝말잇기

두 발을 딛고 사는 이곳 너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발신에 우리가 제대로 수신하지 못해서라는 생각 역시 해본 적이 있다. 발신할 수 없다면 수신할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미약하게나마 그 시도를 도울 것이다.

 

아밀 어느 부치의 섹스로봇 사용기

인간 여자를 대하기 어려운 영민은 여성형 섹스 로봇 리아를 렌탈한다. 로봇의 존재 명분은 차치하더라도 행위로 이어지기까지 상대를 기다리고 배려하는 태도나 방법이 여느 인간보다 뛰어난 리아의 성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그래밍이 된 리아의 일관된 태도에 영민은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새로운 상처를 받는다. 우리의 성장엔 어느 정도의 업데이트가 필요할까.

 

안윤 핀홀

퍼즐을 맞춰나가듯 초반에 흩어진 채 무작위로 나열된 이야기 파편들이 유의미한 서사로 윤곽이 드러난 순간 되레 심란해졌다. 나의 결핍을 채워줄 거라 믿었던 반려자에게서 더 큰 균열을 발견한 순간 나는 보라처럼 그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이유리 달리는 무릎

환상적 요소를 일상과 버무리는 솜씨가 일품인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녀의 전작인 이구아나와 나가 떠오르는데 비교하면서 읽으면 배로 재미있겠다. 어느 날 주인공에게 의뢰자가 찾아온다는 설정은 유사하나 전작은 거래하는 당사자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된 독립 개체인 것이 반해 신작의 의뢰자는 무려 해결사의 무릎 안에 존재한다. 작가의 마르지 않는 상상력, 펼친 설정을 방치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다시 매듭짓는 고수의 냄새가 난다.

 

최추영 무심과 영원

진주는 검도를 하며 한때 교제하는 사이였던 옛 연인과 심리적으로 완전한 안녕을 고한다. 촉각적 심상이 두드러지는 이별 이야기라니 그 흔치 않은 접근이 아주 매력적이다. 검도장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내딛는 뒤꿈치, 머리부터 호구를 하나씩 착용하며 체형에 맞게 몸이 조여지는 순간에 그녀는 그를 떠올린다. 구호와 함께 그녀가 죽도를 들고 공중에서 휘두르는 행위는 홀로 남겨진 자가 스스로 구원하려는 살풀이 같기도 하다.

 

낯선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에 끌리는 내 취향에 대체로 부합했으나 소화하기 다소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다. 하나씩 꼭꼭 씹어 삼키면서 읽고 싶은 욕심을 부리려다 이내 힘을 빼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모르겠으면 넘어가쇼. 그냥 흘러가게 두라며 안심시키는 단편집을 만난 이상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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