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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밀애(密愛) (총4권/완결)
이한 / W-Beast / 2016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 스포일러 없이는 리뷰를 쓸 수 없을 것 같지만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모르니 스포가 싫으신 분들은 패스를 해주세요.
리뷰를 쓰기 전에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써야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요. 음, 첫 시작은 이렇게 하죠. 저는 사실 이 소설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이한님의 소설을 거의 모두 다 소장본으로 가지고 있지만요. 이 밀애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구입했고 좋다는 평가를 보기는 했지만 왠지 손이 안 갔어요. 전작을 읽었을 때 문체가 상당히 특이해서 각을 잡고 읽어야한다는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피폐한 시대, 배경은 수용소, 인물들은 떼로 나오는 거친 남자들이라니. 제 취향과는 몇억광년쯤 떨어져 있는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진짜 기대하지 않고 이북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소장본을 파본검사만 한 채 OPP 봉투안에 봉인해둔 예전의 저를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풀지 않고 곱게 모셔둘 생각이에요. 닳거나 떨어뜨리거나 손때가 묻을 수도 있으니까요. 취향과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인상적일 수도 있나 싶습니다. 역시 필력과 이야기의 힘이란 모든 걸 넘어섭니다. 가독성도 굉장히 좋네요. 문체 때문에 걱정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비록 며칠을 꼼짝 못할 정도로 안타깝고 우울했지만 정말로 좋았습니다. 꼭 읽어보아야할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알 수 없는 시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모를, 벌써 몇년간 물자 공급선이 오지 않는 고립되어 있는 수용소. 진급을 위해서라면 아내도 팔아넘길 냉혈한 매부가 관리하는 곳, 의무실의 침대에서 산은 눈을 뜹니다. 자신이 왜 여기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리곤 다짜고짜 곤봉을 휘두르는 간수, 몸상태에 대해 질문하는 의사,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수용소의 책임자라는 소령, 별칭 매부를 만나고 불안함에 떨며 운좋게 자신을 데리러 온 방 동료를 만나 방으로 돌아가요. 방에서 만난 건 특기 덕분에 특권수에 속한다는 동료들이죠.
산이 왜 기억을 잃었는지 여긴 어디인지 무슨 상황인지 산의 시점으로 전개되기에 저도 함께 혼란스러웠습니다.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소령), 힘을 가지고 있는 (하일록) 사람들을 두려워도 하고 불안해도 하면서 수용소의 나날들이 흘러갑니다. 기억상실과 산의 불안감이 잘 표현되어 있어요. 그러던 중에 산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수용소에서 만났던 남자에 대해서. 그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찾고, 잃어버리고, 오해를 하고, 결국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 모두. 그러나.
이야기의 전말은 가장 마지막에 주인공과 산이 함께 했던 과거를 통해 짧게 서술됩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비극은 내재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중에서도 나오죠. '원래 예민한 성정이었다'. 어머니의 태내에 쌍둥이 여동생이 함께 잉태되었던 것과 함께.
사랑했던 남자의 소식을 알기 위해 외부로 편지를 전달하다가 발각된 후 있었던 소령과 산의 면담에서 소령은 '교정기관은 재소자를 극단적인 절망으로 떨어뜨려서는 안되고 항상 희망이라는 출구를 남겨놓아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령은 그러기 위해 공들여 수용소를 휘두르죠. 그런 시간 속에서 산의 희망은 주인공의 보호를 받으며 죽고 또 다시 태어납니다. 손에 쥔 것은 놓아버린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고 또 돌이키려고. 결국 다시 돌아온, 관계의 가장 처음과 유사한 상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을 남겨놓기 위한 아슬아슬한 주인공의 줄타기 속에서 산의 사랑과 희망은 계속 돌이켜지겠죠. 사실 이 이야기는 산의 기억상실이나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슬퍼 보이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을 보이게 된 사람에 대한, 힘겨운 나날들 속에서 그와 그의 삶을 위해 벽과 철조망을 쌓고 지켜보고 희망을 통제하는 버림받은 주인공의 은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죠.
그리하여, 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