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문화재 -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엮음 / 눌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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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 눌와 / 243


문화재는 그 나라의 유무형 문화유산이자 정신이고 역사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이니만큼 많은 문화재가 있었지만 몇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많은 수가 파괴되었고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문화재가 망실되었다.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해외에 있는 우리문화재의 수는 약 15만점이 넘는데 이중에는 불법 약탈된 문화재는 물론 합법적으로 취득한 문화재도 포함된다. 약탈문화재는 될 수 있는한 돌려받아야 하지만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재를 파악할수 없는 문화재나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는 문화재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양의 문화재가 해외에 유출되었는지 알수 없는 일이다. 역사의 비극이고 국력이 약한 탓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도 자칫 유실될 뻔한 것을 목숨까지 걸고 지켜낸 존재와 인물에 관한 것이다. 모두 열세편의 문화유물이야기가 담겨있다.

임진왜란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선비들,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한 경천사십층탑,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 만신창이가 된 광화문, 안용복이 지킨 독도, 프랑스에 있는 직지심체요절, 일본땅에서 끝내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 자선당, 독일에서 돌아온 겸재화첩, 야스쿠니의 북관대첩비, 남아있는 덕수궁, 625전쟁때 지켜진 고찰들, 도둑맞은 건봉사 진신사리,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노거수들 등에 관한 이야기다. 이 유물들은 각각 존재와 가치를 알아내고 온 힘을 다해 이를 지켜낸 사람들 때문에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게 되었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지 않은 일이다.

 

경천사십층석탑은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현관에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원래 유물이란 제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경천사는 개성에 있던 절이었으니 차라리 홀로 박물관에 보존된 것이 다행이지도 모른다. 1348년에 세워져서 후일 원각사 십층탑의 모델이 된 탑이다. 국사교과서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이라고 설명이 되었듯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대리석십층탑이고 층마다 기와지붕의 모양으로 조각되어있다. 이탑은 1907년 우리나라에 온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그 자태를 탐내 무단으로 주민들을 협박하여 탑을 해체 일본으로 실어갔다. 이를 안 영국인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이에 호응하여 일본의 영자신문에 비판기사를 실어 약탈행위를 고발했다. 사실이 외국에도 알려지고 일본내에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마침내 1918년 다나카는 탑을 한국에 반환하게 된다. 석탑은 많은 부분 훼손되어 경복궁앞뜰에 방치되었다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고 1995년 본격적인 해체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경복궁에는 동궁의 침전인 자선당이 있다. 1430년 건립되어 임진란대도 살아남았던 몇 안되는 전각이다. 1915년 데라우치총독이 총독부건물을 짓기 위해 경복궁을 마구 훼손하던 당시에 많은 수의 전각이 일본과 민간에 팔려나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지을 때 330여동의 전각이 있었는데 일제시기에 200여동이 헐리고 팔려나갓다.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일제기 일본의 거상으로 선린상고의 설립자고 동경에 오쿠라슈코칸이라는 사설 박물관을 건립했다. 우리나라에서 악명높은 문화재 약탈범 오쿠라는 두명인데 오쿠라재벌 오쿠라호텔설립자 격인 오쿠라 기하치로는 성이 大倉이라 오오쿠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명의 오쿠라는 오쿠라 다케노스케인데 성이 小倉으로 우리 약탈문화재로 가득한 오쿠라컬렉션의 주인이며 오오쿠라와 구별하여 오구라라고 부르기도한다. 둘다 악질이다.) 에게 팔려 동경의 자기집 안에 재조립되어 사설 박물관 조선관으로 사용되었다. 미국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자선당의 온돌방식에 감탄하고 이후 그가 설계한 집에 온돌난방방식을 적용했다는 여담도 실려있다. 이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리고 잔해만 남게 되었다.

 

목원대 교수 김정동은 일본에서 공부하던중 오쿠라가 자선당을 뜯어갔다는 내용을 접하고 그 흔적을 쫒았다. 오쿠라호텔을 찾아가 정원 한구석에서 기단과 주추만 남은 건물터를 발견하고 이를 국내 학계에 공개하였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큰 관심을 받아 1996년 유구만 남은 자선당을 한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110톤의 유구는 경복궁으로 돌아와 지금 건청궁옆에 보존되어 있다. 비극이자 코미디다.

 

임진왜란시 정문부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길주에 있던 것을 러일전쟁당시 일본군 2사단이 치욕스럽다며 뽑아서 일본으로 가져갔고 연유를 알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정도가 아니라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는데 1909년 조소앙이 처음 비석의 존재를 알렸고 1978년 재일학자 최서면이 이를 공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해주정씨 문중과 외무부를 비롯 다양한 경로로 비의 반환촉구운동이 전재되었고 남한과 북한가 일본의 불교계가 협동하여 2005년 국내로 반환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비는 국립박물관에서 복원과 보존처리를 하고 2006년 3월 북한으로 인도되어 현재 김책시 임명리에 설치되어있다.

 

이외에도 기가 막히거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유물과 고마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지금 유출 문화재 환수를 위한 민간단체로는 혜문스님의 문화재제자리찾기 가 유명하고 정부에서도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을 설립하여 여러 방면으로 유물문화재의 회수에 힘쓰고 있다. 관심과 적극적 행동, 나아가 국력만이 우리것을 되찾는 길이다. 프랑스에서 돌려준다고 약속한 것조차 주지 않고 버티는 현실인데 과연 중국에도 그렇게 했을까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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