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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초반부터 몰입, 몰입. 주인공이 내 손을 잡아 끌고 야만의 현장에 동행하게 하는 소설.
아주 뛰어난 사람 외에는 모두 당대의 세계관에 갖혀 살게됨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함.
당대의 도덕 기준으로는 평범하다 하더라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야만적인 농장주들...
같은 모습을 나찌에 동의 했던 평범한 독일 국민에게서 본다.
조선시대 맘 좋은 지주에게서도 보고,
현재의 맘 좋은 기업 오너들에게서도 보고,
심지어는 나에게서도 본다.
평범한 나는 시대의 상식에 따라 선배에게는 존대와 복종을, 후배에게는 지배와 하대를 해왔다. 아내에게는 육아와 집안일의 자연스런 책임자 역할 그리고 며느리 역할로 '당연스레' 무언으로 푸시하였다.
평범한 나는 한국적 상하 문화에 지배당한 나머지, 수많은 구속을 구속이라 느끼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노예의 시대든 아직도 전근대적인 한국의 현시대든... 서로 불편함 없이 살아가면 그것으로 좋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은가? (절대적인 도덕률도 없는 것 같은 이 판국에)
내 생각엔 아니다.
절대적인 도덕률이란건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더 나은 상태는 있다.
노예의 시대보다 전근대를 살고 있다해도 현시점의 한국이 낫다.
또, 한국의 상황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이 낫다.
좀더 사대주의적(?)으로 말해본다면,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은 한국인보다 약간의 미래를 즐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과거 단계에 있다.
서로 다른 도덕률을 관통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시대마다 변하지만, 그래도 인간 사회가 추구해 가야할 지향점은 있을게 아닌가?
좀 엉뚱하지만, 인류가 진사회성 동물로써(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처럼) 함께 모여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게임 규칙이 인류 도덕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은 왜 필요한가? 함께 사는데는 어떤 룰이 필요하니까.
왜 자꾸 변하나? 집단의 크기와 생산력이 자꾸 변해 왔으니까.
재미있는건,
동물들도 집단을 이루고 그에 따라 그 종의 파워와 지위를 갖는다는 것.
(이 부분은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보길 권함.)
우리 인간의 뇌용량도 결국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집단의 크기(우리 종의 힘의 크기와 비례)와 관계된다는 것.
우리보다 더 좋은 뇌를 가진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막강한 크기의 집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만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들의 사회는 어떠할까?
아직 인류는 서로에 대한 의심을 모두 풀고 하나로 연대하여, 평화롭게 공존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뇌로도 가능한 미래일까? 아니면 아까 그 외계인에게나 가능한 영역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