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패자 1부 1 - 풍림화산의 깃발
이자와 모토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들녘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2부 7권, 2천5백여 쪽 분량이라면 역사소설로도 짧은 편은 아니지만 <야망 패자>의 서술은 매우 간결하다. 80년대 일본 독자들이 소일거리를 전처럼 아쉬워하지 않게 된 탓도 있겠지만, 소설-영화-드라마를 불문하고 역사물이 범람해 온 일본에서 독자들이 소설을 위한 소설보다 실제 역사를 보여주는 교양물로서의 역사소설 쪽으로 기울어진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야망 패자>는 앞 시기 일본 역사소설들에 비해 등장 인물들 사이의 복잡미묘한 심리관계를 천착하기보다 시대변화의 거시적 지표를 담는 데 치중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신겐과 간스케 사이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간스케는 다케다 집안의 대를 이은 가신이 아니라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신겐을 선택해 주군으로 모신 인물이었다. 영주들은 한없이 격해지는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 천하의 인재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게 되고, 가신으로서의 뿌리를 가지지 않은 이 인재들이 천하통일의 새로운 이념을 제기하고 나서는 시대변화가 두 군신의 관계 위에 투영되어 있다.

전쟁이 주된 소재이지만 전쟁이 싸움터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진리가 이 소설에서는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광산을 개발하고 홍수를 방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상적인 사업들이 숨가쁜 전투행위 못지않은 박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저자가 당시의 시대상황을 넓고 깊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재미에 그치지 않고 센코쿠 말기의 일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야망 패자>는 뛰어난 역사소설이다.

<야망 패자>는 1부 '풍림화산의 깃발'과 2부 '쾌도난마의 깃발'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다케다 신겐, 2부는 오다 노부나가의 면모와 패업의 추구 과정, 그리고 대결과 승패의 시말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 편과 네 편, 선과 악 사이의 2분법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야망 패자}는 불확실성의 시대 독자들의 취향이 투영된 소설이다. 등장 인물들의 움직임은 도덕적 기준이나 불굴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과 주어진 상황이 마주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가장 정의를 중시하는 인물 우에스기 겐신의 경우에도 그 도덕성이 독립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성향에 뒷받침되고 상황에 따라 제한되는 모습을 그린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간스케가 자신을 대나무 아닌 소나무에 비유하는 데서도 이 소설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곧고 단단하지만 칼을 맞으면 깨끗이 동강나 버리는 대나무보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칼을 맞으면 끈끈한 진액으로 그 칼날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소나무의 성정을 내세운 것이다. 손쉬운 양자택일의 길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을 보이는 인간에게 저자가 베푸는 애정은 명쾌한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승리는 5할의 승리, 즉 신승(辛勝)이며, 그 다음은 7할의 승리, 즉 낙승(樂勝)이다. 10할의 승리, 즉 완승(完勝)은 패배보다 못한 승리다. 신승은 용기를 낳고 낙승은 게으름을 낳으며 완승은 교만을 낳기 때문이다. 10할의 승리에는 10할의 패배가 뒤따를 수 있지만 5할의 승리 뒤에는 패배하더라도 5할 선에서 수습할 수 있다.'

신겐의 이 말은 이 소설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는 상식 밖의 교훈 중의 하나다. 인간은 누구나 완성을 추구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과정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절실하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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