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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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즐겨 읽던 동화의 레퍼토리 중에는 유난히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가 많다.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의미이며, 미래에 대한 기대는 삶의 동력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신중하지 못한 소원 빌기는 때로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소원을 빌어보면 좋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라파엘은 자살을 결심한 순간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만나게 된다. 


1830년 10월의 파리, 학자의 꿈을 키우며 필생의 역작을 집필하기 위해 노력하던 라파엘은 생활고와 연애 실패로 크게 좌절한다. 마지막 수중에 남은 돈까지 도박장에서 탕진한 후 자살을 결심하고 헤매던 중 한 골동품가게의 주인에게서 나귀가죽을 받는다. 그 나귀가죽은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럴수록 가죽은 작아지고 결국에는 생명의 소멸까지 불러오는 물건이었다. 처음엔 믿지 않던 라파엘이지만, 자신이 내뱉다시피 말한 휘황찬란한 파티에 불려가게 되고 뒤이어 거액의 연금까지 받게 되자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 발자크에게 작가적 명성을 가져다주기 시작한 작품 <나귀 가죽>은 1831년 작으로서 1830년 7월 혁명 직후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으로 왕당파가 재부상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은 권력을 지향하는 세력이 되면서 황금만능과 출세지상주의를 추구한다. 


소설은 혁명이후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격변하는 환경속에서 개인의 영달과 부를 추구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때로는 탐욕스럽고 때로는 신랄하게 묘사된다. “우리에게 조국은 사상이 한 줄당 얼마로 계산되어 거래되고 매매되는 수도이며, 날마다 산해진미의 만찬이 나오고 수많은 공연이 펼쳐지는가 하면 색정적인 창녀들이 북적거리고 공연 후 야식은 다음날 새벽이나 돼야 끝나며 연인들은 합승마차처럼 시간당 얼마로 계산되어 맺어지는 수도 파리이지.(p.81)”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며 역사를 통과한다. 대혁명과 나폴레옹제정, 왕정복고, 입헌군주제(시민왕시대)를 거치는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이 바로 발자크의 뮤즈였다. 자신의 소설 작품들을 엮어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문학으로 구축하려 했던 발자크는 <인간희극>을 구상하고, 그중 ‘철학 연구’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 작품은 삶의 욕망과 존재의 모순을 형상화한다.


평생 사업의 실패에 따른 큰 빚을 떠안고 살아야 했던 발자크는 돈에 대한 집착이 컸고 안락한 삶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존재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통찰은 그러한 작가의 생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돈이 없어 쩔쩔매던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욕망에 충실한 짧은 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감정의 절제와 금욕으로 생기 없는 삶을 이어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경제적 궁핍과 애인의 변심으로 생을 마감하려던 라파엘은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마법의 나귀가죽을 갖게 되지만 생을 이어가기 위해 모든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결국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게 아니라 삶의 곳곳에 놓인 모순의 함정을 직시하고 방향성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발자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고 열정적인 삶과 엄청난 노동력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지만 건강을 돌보지 않아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가난한 시절의 라파엘은 무명시절의 발자크를 연상하게 하지만, 발자크는 라파엘과는 정반대의 길을 감으로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과 욕망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질문은 1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장황한 문장과 소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지금의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3분의 2가 만 하루도 안 된 시간에 벌어지는 내용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라파엘의 입장에 서서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소원’과 ‘욕망’의 끝없는 질문에 종지부를 찍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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