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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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슬프다 오!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다

달아나리라 저 멀리 달아나리라

-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중에서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롤라 이 바스티다(Joaquin Sorolla y Bastida) 1905년에 그린 「The Bath, Javea」라는 작품이다. 20세기 초 스페인 회화를 대표하는 그는 1900년 이후 주로 고향 발렌시아 바닷가를 화폭에 담았는데, 그의 작품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지중해의 빛과 물, 사람들을 포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존 밴빌의 『바다』를 읽는 동안 몇 개의 그림이 떠올랐는데, 맨 처음 생각난 그림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극중 화자인 맥스가 50년 전 시더스에서 그레이스 가족과 보냈던 시간이 마치 이 그림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인 맥스와 포토그래퍼가 되고 싶었던 애나가 주인공인 『바다』는 한마디로 에 대한 소설빛과 빛의 부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바다』는 조명기술자에 의해 세밀하게 밝기가 조절된 공간처럼 그때그때 의 양을 조절하면서 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호아킨 소롤라 이 바스티다의 그림은 세상이 만들어지던 그 때, “빛이 있으라던 신의 명령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던 바로 그 시원(始原)을 떠오르게 한다 

 

맥스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닿은 곳은 시더스였는데, 그곳은 빛의 공간이었다. 바다엔 빛과 물이 가득했고, 하층계급의 아이인 맥스에겐 신들처럼 보였던, 그래서 동경했던 그레이스 가족이 있었다.

 

아내를 잃은 맥스는 현재를 살거나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하고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p.206)하기 때문이며, 추억이야말로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신들의 공간에 온 맥스는 그곳에서 아내가 투병하던 열두 달의 일기를 쓰고자 한다.

 

일기를 썼어야 하는데. 재앙의 해의 일기를. (p.29)

 

신의 공간, 빛의 공간에 돌아온 맥스는 왜 이곳에서 죽음을 복기하는 것일까? 재앙의 해의 일기를 쓰는 것이야말로 맥스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후의 변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세의 가능성, 또는 그런 것을 줄 수 있는 어떤 신의 가능성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볼 때, 신을 믿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일 것이다. 내가 고대하는 것은, 그래, 세속적 표현의 순간이다. 바로 그것, 정확하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표현될 것이다. 완전하게. 나는 연설될 것이다. 마치 고상한 폐회사처럼. 한마디로 나는 말해질 것이다. 이것이 늘 내 목표 아니었던가?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은밀한 목표 아니던가? (p.173)

 

존 밴빌이 맥스를 미술사학자로 설정한 점, 미술사학자인 맥스가 시더스에 내려와 한 일이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논문을 쓰는 일이었다는 것도 이 점을 증명한다.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는 상징주의와 폴 고갱에게서 영감을 받은나비파를 결성해 활동한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1893년 마르트 드 멜리니를 만났다. 마르트는 194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나르의 아내이자 뮤즈였다. 보나르는 일상의 마르트를 종종 화폭에 담았는데, 특히 마르트가 욕조 안에 있는 작품은 100여 점에 이를 정도로 많다. ‘앵티미슴(intimism, 정감 있는 가정 내의 일상생활을 잘 묘사해 소박한 생활 감정을 표현하는 것)’ 회화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보나르는 1947년 남프랑스 르 카네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며 빛과 색채에 천착했다. 관능적인 색채와 시()적 암시는 보나르 회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존 밴빌은, 그러니깐 존 밴빌의 작품 속 페르소나인 미술사학자 맥스는 기존의 이러한 평가와는 사뭇 다르게 보나르를 본다. 존 밴빌은 143쪽에서 145쪽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피에르 보나르와 그의 필생역작인 「개와 함께 있는 욕조의 누드」에 대해 서술한다.

 

 

 

1893년 피에르 보나르는 파리의 전차에서 내리는 연약하고 창백하면서도 어여쁜 소녀에게 끌려 그녀의 일터인 장례식장에 따라간다. 소녀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장례식용 화환에 진주를 꿰매는 일이다. 맥스는 이 첫 장면을 두고 이렇게 해서 출발부터 죽음이 검은 리본을 그들의 삶에 짜넣었다.”(p.143)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3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결혼을 하는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소녀는 열여섯이 아니라 보나르와 마찬가지로 20대 중반이었고, 그녀가 알려줬던 마르트 드 멜리니라는 이름조차 진짜가 아니었다.

 

마르트는 르보스케에 살 때 욕조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생겼는데, 보나르는 욕조에 들어간 그녀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렸다. 이 연작은 심지어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 되었다. <욕조>는 보나르 필생의 작업에서 찬란한 절정이다. 마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941년에 시작해 1946년에야 완성한 <개와 함께 있는 욕조의 누드>에서 마르트는 분홍색과 엷은 자주색과 황금색으로 욕조에 누워 있다. 둥둥 떠 있는 세계의 여신으로, 가늘어졌고, 나이를 잃어버렸고, 살아 있는 만큼이나 죽어 있다. 그녀 옆의 타일에는 그녀의 작은 갈색 개, 그녀의 친구가 있다. 닥스훈트 같다. 개는 깔개, 아니면 보이지 않는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조각난 사각형의 햇빛일 수도 있는 것 위에 웅크리고 앉아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은신처인 이 좁은 방은 그녀 주위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 색깔들 속에서 고동치고 있다. 그녀의 발, 그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긴 다리 끝에서 긴장한 왼발이 욕조를 밀어 모양을 일그러뜨린 것처럼 보인다. 욕조는 왼쪽 끝이 튀어나왔고, 그쪽의 욕조 밑도 똑같은 힘의 영향을 받았는지 바닥이 한쪽으로 끌려가 줄이 맞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그쪽 모서리로 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다. 전혀 바닥 같지 않고 차라리 빛이 아롱지는 물이 움직이는 웅덩이 같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인다. 고요 속에서, 물 같은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물 한 방울이 똑 듣는 소리, 잔물결 하나가 이는 소리, 한숨 하나가 팔랑이는 소리가 들린다. 목욕하는 사람의 오른쪽 어깨 옆 물속의 녹빛 붉은 반점은 진짜 녹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래된 피일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허벅지 위에 있는데, 밖으로 돌리는 동작중에 정지해 있다. (pp.144-145)

 

한 여자만을 사랑해서 평생 그녀를 그린 남자, 관능적인 색채와 시()적 암시로 빛과 색채에 천착한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라는 기존의 평가와는 사뭇 다른 평가이다. 맥스는 보나르의 그림에서 색과 빛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만큼이나 죽어 있는한 사람, 음습한 정적과 고요를 본다. 이것은 명백한 죽음의 암시이다. 

그렇다면, 기실 상반되어 보이는 이러한 평가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그녀도, 나의 애나도 몸이 아프자 오후에 오랫동안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달래준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서서히 죽어가던 그 열두 달의 가을과 겨울 내내 우리는 바닷가 우리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마치 르보스케의 보나르와 그의 마르트처럼. (p.145)

 

「개와 함께 있는 욕조의 누드」가 마르트가 죽기 1년 전부터 그린 그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그림은 맥스에게 죽은 아내를 떠오르게 했을 것이다. 애나도 몸이 아프자 오랫동안 목욕을 했고, 그 둘 역시 르보스케의 보나르와 마라트처럼 바닷가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따라서 맥스에게 보나르는 빛과 색채에 천착한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라기보다는 시골에 은둔하며 그림만 그린 비극적이고 불행한 예술가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보나르나 그의 필생의 역작에 대한 맥스의 평가는 재앙의 해의 일기의 한 부분이었던 셈이니 말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빛과 색이 서서히 사라져 무가 되어 가는 과정인지도, 혹은 찬란한 색과 빛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무와 폐허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말년으로 갈수록 빛과 색채에 더욱 천착했다는 보나르와 그의 예술작품들은 무의미한 것일까? 맥스의 평가처럼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벨 에포크에도 불안은 늘 그 순간을 잠식하고 마는 것일까?

 

이상해.” 애나가 말했다. “여기 있다는 게, 그런 식으로, 그러다 없어진다는 게.” (p.197)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던 애나는 죽음을 앞두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카메라를 찾는다. “그러니까 마지막의 초기, 그녀가 여전히 치료를 받고 도움 없이 침대에서 일어날 힘이 있었던 때”(p.164) 애나는 병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늘 흑백 필름만 좋아했던 애나는 생의 마지막에 컬러필름을 사용하여 사진을 찍는다. 사진 자체도 놀라웠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상처, 꿰맨 자국, 화농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웃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익살맞게 자기를 비하하는 듯하기도 했고, 어떤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그래, 어떤 분명한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했”(p.171). 사진 속에서, 사진을 매개로 고통받는 여성들 간의 우애가 형성된 것이다.

 

빛과 색채에 천착한최후의 인상주의 화가였던 피에르 보나르의 빛과 색이 충만한 그림에서 어둠과 불안,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 맥스와 흑백 사진만 찍다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컬러 필름을 이용한 애나, 이 두 인물의 극적 대비를 통해 존 밴빌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두 가지 평가, 한 여자만을 사랑해서 평생 그녀를 그린 남자시골에 은둔하며 그림만 그린 비극적이고 불행한 예술가만큼이나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생의 숨겨진 의미가 여기에 있다. ‘진실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수많은 것들의 사이 어디 쯤에 존재하는 것처럼, 인생의 의미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말하여지고 설명되어지는 보편적인 인생보다 우리가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각자의 인생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사진들은 내 사건 기록이야.” 애나가 말했다. “내 고발장이지.”

당신 고발장이라고?” 내가 무력하게 물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뭘 고발해?”

애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 모든 걸.” 애나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걸.” (p.172)

 

맥스가 빛의 공간에서 죽음을 복기함으로써 말하고자 했던 것, 죽음이 임박한 애나가 사진을 통해 기록하고 고발하고자 했던 것, 이 둘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동일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하나만 참이거나 옳은 것이 아니다. 인생은 참과 거짓으로 논할 만한 성질의 것이 못 된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바다 옆의 방(Rooms By The Sea, 1951)」이란 작품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은 대개 도시민의 고독감과 절망감을 그렸다고 평가되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방금 누군가를 떠나왔거나 떠나보낸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 텅 빈 방은 바다가 지닌 속성 때문에 외로움과 고독이 더욱 배가 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이 작은 방 안은 빛이 가득하다. 피에르 보나르가 아름다운 색과 빛으로 사랑하는 마르트를 그렸던 그녀의 작은 욕조작은 방처럼, 빛으로 충만하다.

 

알랭 드 보통은 『동물원에 가기』에서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호퍼 그림의 묘한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돕는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설명대로라면 호퍼의 이 그림은 고독하고 황량한 그 무엇을 묘사하지만 이 그림 자체가 황량하거나 고독하지는 않다. 오히려 호퍼의 이 그림은 자신의 내면의 슬픔을 직시함으로써 슬픔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맥스와 애나(, 그리고 보나르)가 본 것은 바로 이 같은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 그림이야 말로 존 밴빌이 『바다』를 통해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흰 벽에 둘러싸인 작은 방.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빈 방. 빛이 가득한 작은 빈 방. 사람에 따라 이 중 무엇을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모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실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은 사실 우리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기억하게 되고, 비로소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된다.

바다로 떠난 인간은 그곳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곳에 서 있는데 갑자기, 아니, 갑자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몰려오며 몸을 들썩이듯이 바다 전체가 솟아올랐다.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것처럼 보이는 부드럽게 굽이치는 너울이었다. 마치 저 밑에서 거대한 뭔가가 몸을 흔든 것 같았다. 나는 몸이 잠깐 들려 해변 쪽으로 약간 밀려갔지만, 다시 전처럼 두 발로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저 큰 세상이 또한번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한 것일 뿐이었다.

그때 간호사가 나를 부르러 왔고, 나는 몸을 돌려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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