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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 진리를 향한 주체
피터 홀워드 지음, 박성훈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철학은 인내를 요하며
그 개념들은 서서히 파악되어야 하고 지나치게 서두르는 독자들은 장애물이 많은 텍스트적 지형과 약간은 생소한 용어에 좌절해야 한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이 책의 저자 피터
홀워드는 바디우의 저술이 대개 추상적이며 읽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난해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도 그랬다. 나는 바디우라는 이름은 자주 들어봤지만 그의 저작을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바디우는 난해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홀워드는
바디우가 사용하는 프랑스어는 심오함보다는 구문론적 명확성, 감각적 연상보다는 논리적 배열, 의문보다는 단언, 몽상보다는 확신,
복잡화보다는 추상, 다의성보다는 일의성에 특권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바디우가
덜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홀워드의 탁월한 개설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슬라보예
지젝이 머리말에서 우려했듯이 이 책이 “원저자의 저작보다는 개설서를 선호하는 최근의 통탄할 만한 세태에
기여”하게 될 것 같다. 지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바디우의 원저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아직 연구가 충분히
많이 진행되지 않은 분야의 번역서를 이해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언어가 사고 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프랑스어로 쓰여진 바디우의 원서나 영어로 쓰여진 이 개설서
모두 한국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언어의 특성은 글쓰기 방식에 그대로 드러난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프랑스어적’으로 사고하고 글을 쓰며,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영어적’으로 사고하고 글을 쓴다. 영어를
예로 들자면 (불어도 거의 비슷하지만), 영어는 장황한 문장을
구성하기에 참 편한 언어이다. 영어 문장에서는 주어가 나오고 그 전체 문장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동사) 밝혀준 다음에 긍정하거나 부정하려는 대상이 무엇인지(목적어) 소개한다. 여기에다가
관계대명사를 이용해서 그 대상(목적어)를 수식하는 문장을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다. 이렇게 문장이 길어져도 독자는 문장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반면 이런 문장을 한글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된다. “바디우는 헤겔이 어쩌고
저쩌고한 A, 비트겐슈타인이 어쩌고 저쩌고 한 B, 마르크스가
어쩌고 저쩌고 한 C를~.” 이쯤 되면 독자는 바디우와 헤겔,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의 관계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계속 보류한 채로 (그리고 생소한 A, B, C라는 개념도 머릿속 다른 한 구석에 저장해
놓은 채로) 문장을 계속 읽어 나가다가 끝에 가서야 “~부정했다.”와 같은 서술어를 만난 뒤, 앞서 나온 모든 개념을 머릿속에 재배치하고
이 문장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완료하게 된다. 영어 사용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장 구성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의식의 흐름에 부합하지만, 이것을 번역된 글로 읽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원저자가 한국인이었다면 애초부터 문장을 저런 식으로 구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장 구성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독자들의 이해에 걸림돌이 된다. 예컨대 commitment는
사전에서 ‘헌신’ 또는 ‘전념’이라고 설명되지만 실제 문장에서 이 단어를 그렇게 번역하면 매우 어색하고 심지어 혼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다른 적절한 번역어가 없는 것이 문제다. (영한사전의
대대적 개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렇지만 사실 저자의 주장에서 핵심적이지 않은 이러한 단어들은 사소한
문제에 해당한다. 더 큰 문제는 원저자나 혹은 그 계열의 연구자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롭게 창안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개념(이나 신조어)들이 한글로 호환되지
않거나 그 뉘앙스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번역자와 독자 모두에게 큰 좌절이다. 설령 그와 같은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할지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암묵적인 합의가 된 경우더라도, 그 합의의 내용을 일일이 추적해서 자신의
번역을 기존의 번역서들에 맞춰야 하는 부담은 온전히 번역자에게 맡겨진다. 물론 그러한 ‘암묵적’ 합의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고, 썩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성실한 번역자라면 그 단어를 더 좋은 번역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국가론”으로 번역해 왔는지 생각해보라.)
따라서 영어를 이와
전혀 다른 언어인 한글로 옮긴다는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미션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런 류의 책—앞에서 말한대로 ‘아직
연구가 충분히 많이 진행되지 않은 분야의 번역서’—을 제대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자의 모국어를
배워서 원서를 읽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자가 겪었을 고생이 눈에 선했다. 그렇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런 책을 번역서로 읽을 때 독자가 이해하는 양은 번역자가 들인 노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적다. 한국 독자들에게 알랭 바디우가 어려운 것은 그가 계승하거나 반대한 그 모든
서양 철학의 선조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어(나 프랑스어)와 한국어가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나 프랑스어)와 다른 문법 체계를 가진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독자들이 이런 류의 책을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번역이 가지는 이 일반적인 딜레마로 인해 번역이라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 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서를 번역한다는 행위는 원저자의 본뜻을 향한 지난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디우가
‘진리를 향한 주체’에 골몰했던 것처럼, 번역자는 ‘(바디우의) 진리를
향한 번역’에 모든 노력을 쏟게 된다. 그 점에서 번역은
매우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