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신병과 심리학
미셸 푸코 지음, 박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한10년도 훨씬 전에 미셸 푸코의 정신분석이론을 처음 접하고는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의 책을 안 읽다가 유럽과는 전혀 다른 정신병리학 접근법을 갖고 있는 미국에 살면서 푸코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미국의 심리학 혹은 정신병리학에서는 유럽처럼 정신질환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따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환자가 있는 바로 그곳(here and now)에 초점을 맞춰서 환자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symptom을 완화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에 살면서 이런 식의 접근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갈 무렵 다시 푸코를 꺼내 읽게 되었다. 두 대륙의 심리학간에 균형을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푸코는 여전히 어려웠다. 적어도 ‘이 책’의 푸코는 그랬다. 이런 류의 책은 번역이 관건이다. 번역 때문에 책이 쉬워질 수도 있고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번역자가 쉽게 번역하다가 원서의 느낌을 훼손할 위험도 있다. 대중성을 택할지 원서의 맛을 살릴지는 역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원서 자체가 문장 구성이 복잡하고, 전문용어가 생소하고, 한글과 호환성 문제도 있기 때문에, 번역이 훨씬 더 어렵다. 전문용어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없으면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낯설고 추상적인 한자어로 된 용어가 만들어지기 십상이다. 원서의 문장 구성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도 큰 문제이다. 전문학술서이므로 원서의 구성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번역할 것인가? 이 책의 역자는 전자를 택했다.
문장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12쪽 5-7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이와 같은 고전적인 묘사들의 도식화는 본보기로서, 또한 고전적으로 사용된 용어들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1. 역자가 부러 ‘또한’을 집어 넣은 걸로 비추어 보건대 ‘본보기로서’와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필요로 할 것이다’와 연결된다. 서술어에 연결되는 두 부분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좋은 번역이 아니다. ‘본보기로서’는 명사에 ‘-로서’가 붙어서 부사구가 되었고,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동사에 ‘-기 위해서’가 붙어서 부사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서술어에 연결되기에 균형이 맞지 않아 어색하다.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고정시키기 위해서’와 같이 동격이 되어야 한다. 원문이 어떤지 궁금하다. 만약 푸코가 정말로 (편의상 영어로 표현하겠다) “as an example and in order to fix...”와 같이 썼다면, 그건 번역이 아닌 푸코의 문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필요로 할 것이다’에 연결되는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서술어 바로 앞에 위치해서 괜찮지만 ‘본보기로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문장이 한눈에 안 들어올 수 있다. 게다가 위에서 지적한 번역상의 문제 때문에 독자는 두 부분이 동등하게 같은 서술어에 연결된다는 느낌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원서에서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영어나 불어의 문장 구성은 “in order to become an example and (in order to) fix the original meaning…”과 같이 in order to 에 걸리는 동사들(be와 fix)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하고 나면 이해하기가 약간 어려워진다. 이러한 문제는 전형적으로 영어(불어)와 한글의 비호환성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3. ‘묘사들의 도식화’는 물론 원서 그대로 번역한 것일 테지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묘사’는 (영어로 치자면) description을 번역한 것 같다. 그렇다면 ‘묘사’보다는 ‘설명’이 낫지 않았을가? 영어의 of를 일률적으로 ‘의’로 번역하면 한글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of’는 ‘소유’, ‘주술관계’, ‘about’ 등등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 이 문구를 좀 더 쉽게 풀어서 번역하자면 ‘설명들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쯤 될 것이다.
4. 그래서 이 문장 전체를 조금 쉽게 풀어 쓰자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은 본보기로서 필요할 뿐 아니라 고전적으로 사용된 용어들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번역이 어색한 것도 문제지만 역자는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듯하다.
14쪽에서 편집증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편집증은… 환각현상 없이 체계화되고 일관성 있는 망상의 전개를 보인다. 망상의 테마는 위대함, 박해, 그리고 권리 요구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알고 보면 어려운 말은 아니다. 번역이 딱딱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우선 환각과 망상의 차이부터 보자. 환각은 영어로 hallucination인데,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보거나 소리를 듣는 증상이다. 망상은 영어로 delusion인데, 사실이 아닌 잘못된 사고를 하는 증상이다. 예를 들면 중증 치매환자에 전형적인 증상으로 “집에 손님이 와 있어서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어쩌지?” 하고 ‘잘못된 믿음’을 갖고 안절부절하는 경우가 망상이다. “망상의 테마”로 제시된 “위대함, 박해, 그리고 권리 요구”는 아마도 (영어로 치자면) grandiosity, persecution, and control을 번역한 것 같다. (“권리 요구”는 뭘 번역한 건지 확실히 모르겠다. 그러나 delusional thoughts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control이다.) Grandiosity는 자신을 대통령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처럼 ‘과대망상’을 뜻한다. Persecution은 말 그대로 박해이며, persecutory delusion이라고 하면 남들이 자기를 박해한다고 믿는 것이다. Delusion of control은 남이 자기 생각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위 문장을 다음과 같이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원문과는 조금 다른 번역이 될 테지만.
“편집증에서는… 환각현상 없이 체계적이고 일관된 망상이 전개된다. 망상의 테마는 과대망상, 박해받고 있다는 착각, 그리고 통제받고 있다는 착각이다.”
이 번역이 지나치게 원문을 훼손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박해’가 박해를 한다는 건지, 받는다는 건지 통 알 수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요컨대 한글과 다른 구조를 가진 언어로 쓰인 책을, 그것도 푸코처럼 난해한 책을 번역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원서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자가 원서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한 뒤 이해는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원서를 그대로 살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영어(불어)와 한국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이므로, “원서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한다”는 것은 이미 틀린 말이다. 논리적으로 오류이다. 정말로 원서를 그대로 살리려면 “나는 사랑한다 너를”과 같이 번역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건 번역이 아니다. 그럴 거면 원서를 읽는 게 낫다. “번역”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target language에 맞게 바꾼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최대한 원서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은 원서를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방치하는 행위가 아닐까?
소위 원서를 그대로 살린 번역서를 읽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직역을 이해하는 훈련이다. 전공분야에서 3-4학년쯤 되거나 적어도 석사과정쯤 되면 그런 데 조금 익숙해진다. 웃긴 일이다. 각 학문분과에서 왜 잘못된 언어에 길들여지도록 훈련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석사나 박사쯤 되면 그들은 대중들과는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요즘 언어파괴를 걱정하는 기성세대들이 많은데, 진정한 언어파괴는 대중적인 한글용법과는 동떨어지게 원서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하는 데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책을 앞부분만 조금 읽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딱딱한 번역도 그렇지만, 오역과 편집 실수 때문에 다소 맥이 빠졌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첫째, 13쪽 중간쯤에 아마도 문맥상 ‘형태로’인 듯 한데 형태 다음에 뜬금없이 꺽음쇠가 있다.
둘째, 13쪽에는 치명적인 오역이 발견된다.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편집광manie과 우울증dépression을..."
사전을 찾아보니 불어 manie dépression은 영어로 manic depression에 해당한다. Manic depression은Bipolar disorder와 같은 뜻이다. 조울증이라는 말이다. 위 번역문장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대립된 두 가지 증후군이 교체된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조울증은 mania(조증)와 우울증(depression)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조울증”이라고 번역해야 할 manie depression을 “편집광과 우울증”이라고 했으니 이건 한... 540도 잘못된 번역이다. 이하 문장에서 manie가 따로 쓰인 경우는 ‘조증(조병)’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래서17쪽까지 읽다가 덮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영역본으로 읽어야 할 듯하다. 중쇄를 할 경우 적어도 전문가에게 감수를 한 번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